'영원한 청년' 소설가 최인호(1945~2013)가 환생한 듯했다. 지난 9월 30일 이화여대 후문 건너편 예술극장 필름포럼. 여러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그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하고 그를 추모했다. 제4회 최인호 청년문화상 시상식 행사였다. 그의 '청년 정신'을 잇는 정세랑(42) 소설가가 청년문화상을 받았다.
시상식에 앞서 최인호 원작 단편소설 '깊고 푸른 밤'과 장편 '물 위의 사막'을 융합하여 시나리오를 꾸민 영화 '깊고 푸른 밤'이 상영됐다. 소설 '깊고 푸른 밤'은 1982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이어령(1933~2022) 문학평론가가 주도하는 문학잡지 《문학사상》이 수여하는 이 상은 당대 최고 권위의 문학상이었다.
1985년 개봉된 영화 '깊고 푸른 밤'을 만든 주역은 각색 최인호, 감독 배창호, 주연 안성기·장미희. 명보극장, 코리아극장에서 관객 60만 명을 동원한 히트작이었다.
독립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아담한 극장 필름포럼에서 필자는 40여 년 만에 다시 이 영화를 보며 감회에 젖었다. 그때는 미국이 동경(憧憬)의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별 그렇지 않다. 영화 속에서 미국 편의。에서 일하는 한국인 종업원이 "여기 물건 모두 미제야!"라며 감탄하는데 요즘은 미제 물건이라고 해서 좋다고 할 수 없다. 격세지감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허망함을 밝히는 줄거리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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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불법체류 중인 백호빈(안성기 분)은 임신한 아내를 미국으로 데려오려 시민권자인 제인(장미희 분)과 위장결혼해 영주권을 얻으려 한다. 주한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온 제인은 남편의 폭력 때문에 이혼하고 위장결혼 따위로 돈을 벌고 있다. 백호빈은 영주권을 얻자 제인에게 이혼을 요구해 이들은 이혼여행을 떠난다. 백호빈은 한국의 부인이 보내온 음성 테이프에서 "아이를 지우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극도의 허망감으로 백호빈은 미친 듯 차를 몰고 제인은 백호빈을 권총으로 쏜 후 자신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댄다.
제4회 최인호 청년문화상 시상식. (왼쪽부터)배창호 감독, 정세랑 작가, 이장호 감독, 손정순 대표.
영화가 끝난 후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시네토크에서 김종원 원로 영화평론가는 "주인공들의 황폐한 삶과 죽음을 잘 그렸고 특히 미국 서부의 광대한 사막 배경의 첫 장면과 끝 장면은 한국영화사에 기록될 명장면"이라면서 "안성기, 장미희 연기도 영화사에 남을 명연기"라고 평가했다.
배창호 감독은 "모든 촬영은 미국에서 이루어졌는데 한국에서 간 스태프들이 주눅 들지 않도록 첫 일주일은 휴식하며 현지 분위기를 익혔다"고 촬영 당시를 회고했다.
최인호, 배창호, 안성기 트리오는 '깊고 푸른 밤'에 앞서 '적도의 꽃', '고래사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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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호 원작소설로 영화 '별들의 고향'을 만든 이장호 감독은 "최인호 작가와는 덕수초, 서울중·고 동기생이었는데 청년 때 서울신문사 뒤편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나 영화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영화를 만드는 관계로 발전했다"면서 고인을 추모했다.
쿨투라문화예술연구소(대표 손정순)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이광호 심사위원장은 "정세랑 작가는 문학 장르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한국문학에 새로운 상상력을 도입했다"면서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나오는데도 여성, 퀴어,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현실이 들어 있다"고 심사평을 밝혔다. 수상자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제가 일하던 출판사를 방문하신 최인호 선생님을 스치듯 뵌 적이 있습니다. 대가의 아우라가 공간을 가득 채워 인상 깊었습니다. 그때 우러러봤던 선생님께서 오늘날의 제게 횃불을 건네주신 것 같아 소중히 받아들고자 합니다. 해가 지나며 최인호 선생님을 뵌 적 없는 미래의 청년들이 이 상을 받게 될 텐데 시간을 뛰어넘는 것이야말로 문학과 문화의 존재 목적이겠지요. 선생님을 본받아 시대를 관통하며 작가적 탁월함을 발산하는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정세랑 작가는 2010년 단편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장편 '이만큼 가까이' '보건교사 안은영' '덧니가 보고 싶어'와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냈다.
고승철(언론인·저술가·전 동아일보 출판국장)
다. 그때 우러러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