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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렌스 수도교
ⓒ 이상기
이스탄불을 여행하다 보면 길 위로 지나가는 수도교를 볼 수 있다. 4세기 후반 동로마시대 만들어진 발렌스 수도교다. 4세기 중반 콘스탄티누스 2세 때 시작되어 발렌스 황제에 의해 373년 완성되었다. 이 수도교는 이스탄불 북쪽에 있는 파티흐 숲과 벨그라드 숲에서 수로를 통해 흘러온 물을 콘스탄티노플 도심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신전이 있던 성 사도교회 언덕(제4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제3언덕)을 연결했다.
현재의 지명으로 말하면 파티흐(Fatih) 모스크와 이스탄불 대학교 사이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다. 길이가 971m, 폭이 8m, 높이가 29m나 되는 거대한 석조 다리다. 현재는 그중 921m 정도만 남아 있다. 발렌스 수도교 동쪽에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온천 수영장과 휴양시설인 님페움이 있었다. 수로는 동남쪽 그랜드 바자르를 지나 제2언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궁전, 성당, 아크로폴리스가 있는 제1언덕 서쪽에서 끝난다.
▲ ?예레바탄 사라이: 지하 물 저장고
ⓒ 이상기
수로를 통해 운반된 물은 거대한 지하 저수지에 저장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성소피아 성당과 히포드롬 사이에 있는 바실리카 물 저장고다. 이것을 터키어로 예레바탄사라이(Yerebatan Saray)라 부른다. 지하 저수조 또는 지하 궁전이란 뜻이다. 예레바탄 사라이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바실리카 성당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졌다. 물 저장고의 크기는 가로 138m, 세로 65m의 직사각형으로 8만㎥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바실리카 형태의 성당 건물이었기 때문에, 내부에 336개의 대리석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가로 28개 세로 12개 기둥이 5m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기둥머리(柱頭) 장식이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며 가끔 도리아 양식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신전의 기둥을 성당 짓는 데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지하 물 저장고로 내려가려면 52개의 돌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18/19세기까지 사용되었고,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이후 현대적인 상수도가 보급되면서 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 ?예레바탄 사라이 기둥 받침대: 메두사 머리
ⓒ 이상기
이곳에서 주목할 것은 대리석 기둥의 조각이다. 저수조 북서쪽 기둥 받침대로 메두사의 얼굴 조각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얼굴 조각 하나는 거꾸로, 다른 하나는 옆으로 놓여 있다.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로 보호자 수호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 적이나 악을 물리치는 도구의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공작의 눈을 조각한 기둥도 볼 수 있다. 그 외에 나뭇가지, 눈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어두워서 찾기가 어렵다.
이스탄불 상업의 중심지 그랜드 바자르
▲ ?그랜드 바자르와 누로스마니에 모스크
ⓒ 이상기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술탄 메흐멧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인
1455/56년부터 제3의 언덕 동쪽 자락에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궁중에 직물과 장신구를 공급하는 시장으로 출발했다. 15세기 말에는 벽돌을 사용한 비잔틴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이후 대규모 시장으로 발전했다. 그 때문에 그랜드 바자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7세기 초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고, 당시 3000개의 상.이 입주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대상들의 교역 장소로 번성했다.
그랜드 바자르는 누로스마니에(Nuruosmaniye) 모스크와 베야짓(Beyazit) 2세 모스크 사이에 위치한다. 누로스마니에 모스크는 유럽의 바로크 양식을 응용한 오스만 바로크 양식 건물로 유명하다. 1748년 술탄 마흐무드 1세의 명령으로 건축을 시작해 오스만 3세 때인 1755년 완공되었다. 이 사원에서 주목할 것은 기도실 위에 크고 높게 솟은 돔이다. 지름이 25.4m, 높이가 43.5m나 된다. 이 돔을 사방에서 거대한 아치가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이 아치를 통해 외부로부터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내부가 상당히 밝은 편이다.
▲ ?베야짓 문
ⓒ 이상기
베야짓 2세 모스크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인 1506년 완성되어 그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시대 이슬람 사원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사원 주변에 신학교, 베야짓 2세 영묘, 목욕탕 하맘, 무료급식소, 카라반사라이 등이 있어 종교, 교육, 복지, 상업을 위한 복합적인 시설로 활용되었다. 비잔틴 시대 이곳에는 빵집이 있어 아르토폴레이아((?ρτοπωλε?α)라고 불렸다. 인근에는 또 노예시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자르는 일반적으로 동쪽의 누로스마니에 문으로 들어가 서쪽의 베야짓 문으로 나오게 된다. 그것은 이스탄불 관광의 중심인 아야 소피아 광장 주변을 보고 이곳으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랜드 바자르 안에는 15세기 말 처음 만들어진 지붕 덮인 아케이드 형태의 시장(Bedesten)이 있다. 하나는 안쪽에(?c) 있고, 다른 하나는 누로스마니에 문 근처에 있다. 이들 두 시장은 벽과 문으로 외부와 구별되어 있어 더 귀중한 물품이 거래되었다.
▲ ?그랜드 바자르 내부 기둥
ⓒ 이상기
이들 시장에서는 직물을 중심으로, 보석, 모자, 책 등이 판매되었다. 그리고 바자르 전체에는 양탄자, 피혁, 모피, 도자기와 식기, 가구를 파는 상。들이 구획을 정해 분포하고 있다. 이들 동종 업종의 상인들은 길드를 조직해 독。권을 행사하면서 가격을 결정하고 세금을 납부하기도 했다. 현재 그랜드 바자르에는 2만6000명의 상인이 근무하며, 매일 25만~40만 명 정도 방문객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자르는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문을 연다.
공동묘지인 피에르 로티 언덕을 찾아간 이유
▲ ?국화 부인(가운데)과 피에르 로티(오른쪽)
ⓒ Public domain
아침 일찍부터 이스탄불 최대의 공동묘지인 피에르 로티(Pierre Loti: 1850~1923) 언덕을 찾아간다. 로티는 프랑스 해군 장교로 해외여행을 많이 했다. 그는 1876년부터 이스탄불에서 겪은 특별한 경험을 토대로 소설 <아지야데(Aziyade)>(1879)를 발표했다. 자신이 터키 여성과 겪은 사랑의 이야기를 자전적으로 쓴 소설로,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1880년 로티는 폴리네시아에서 겪은 체험을 토대로 목가적인 소설 <라라후(Rarahu)>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로티의 결혼(Le Mariage de Loti)>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들리브(Leo Delibes)가 이 책을 토대로 1883년 오페라 <라크메(Lakme)>를 작곡하면서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1887년 로티는 일본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국화 부인(Madame Chrysantheme)>을 출간했다.
이 작품에 영향을 받은 롱(John Luther Long)이 1898년 단편소설 <나비 부인(Madame Butterfly)>을 발표했다. 벨라스코는 롱의 <나비 부인>을 토대로 단막극 <나비 부인. 일본의 비극(A Tragedy of Japan)>을 써 1900년 뉴욕에서 초연했다. 이 연극이 인기를 얻자 영국 런던에서도 공연하게 되었고, 푸치니가 이 연극을 보게 되었다.
▲ ?『배너티 페어(Vanity Fair)』에 실린 피에르 로티 캐리커처
ⓒ Public domain
푸치니는 벨라스코의 <나비 부인>을 토대로 2막의 오페라 <나비 부인(Madama Butterfly)>를 작곡해 1904년 2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작곡했고, 리허설 시간도 적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푸치니는 2막을 3막으로 확장하고, 2막과 3막 사이에 허밍 코러스를 넣으며 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수정한 오페라를 5월 브레시아(Brescia)에서 공연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로티는 1891년 프랑스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892년 다시 이스탄불을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단편소설 <동양의 유령(Fantome d'orient)>을 출간했다. 이는 1879년 발표된 <아지야데>의 확장과 해설이라고 볼 수 있다. 로티는 1895년 영국의 주간 잡지 <배니티 페어(Vanity Fair)>에 캐리커처가 실릴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1906년에는 세 명의 부유한 터키 여인들과의 에피소드를 담은 소설 <환멸을 느낀 사람들(Les Desenchantees)>을 발표했다.
▲ ?피에르 로티 언덕 공동묘지에서 만난 인상파 화가 리피즈
ⓒ 이상기
이처럼 다양한 터키 체험을 자전적 소설로 발표한 로티가 이스탄불에서 거주할 때 전망이 좋은 공동묘지 언덕의 찻집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 언덕에 피에르 로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찻집을 찾아 올라가지만 로티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터키의 인상파 화가이자 교육자인 리피즈(Huseyin Avni Lifij)의 무덤만 만날 수 있다. 리피즈는 1909년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해 인상주의 화풍을 배웠고 터키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덧붙이는 글 | 피에르 로티는 프랑스 남서쪽 끝 대서양의 작은 도시 앙다이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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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낭트와 보르도 사이 대서양의 올레롱 섬에 묻혔다.
대리석 기둥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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