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무더웠던 지난여름 읽었던 권병엽 시인의 첫 시집 <모서리>는 오랫동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라면 한 봉지, 버려진 밥솥, 거리를 떠도는 들개 이야기 속에서 나 자신과 지친 이웃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물과 동물에 투영된 노동의 고단함, 서로의 틈을 메워주는 따뜻한 연대의 언어가 준 감동은 깊은 여운으로 남았다.
그 온기의 원천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지난 7일 가을볕이 짙게 내리쬐는 팔공산 자락으로 향했다. 시인의 자택 '도담(道潭)'에 들어서자 정원에서 잡초를 뽑던 권 시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당에서는 아내 박영림씨와 함께 정원의 꽃을 살피고 사과나무를 둘러보는 소탈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담 정원 정자에 앉아 시집 <모서리>에 담긴 시대정신과 일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서리'가 지닌 연대의 의미
▲ ?가을볕이 내려앉는 팔공산 자택 '도담' 정원에서 풀을 뽑다 포즈를 취한 권병엽 시인.
ⓒ 홍영미
권 시인의 시집에는 유독 사물과 동물이 자주 등장한다. 청년 실업과 구조조정, 소외된 노동의 현실을 다루면서도 시인은 사람을 직접 내세워 사회문제를 훈계하듯 설명하지 않는다.
"<소비기한>, <버려진 목소리들>, <낯선 주인을 기다리며>, <들개>, <하울링>은 한 편의 이야기를 다섯 토막으로 나누어 쓴 연작입니다.
온라인야마토릴게임
취업 시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처럼 줄을 선 청년(라면)이 일터를 잃고(버려진 물건), 다시 선택되길 기다리다 구조조정으로 밀려나(들개), 분노마저 소진된 채 울게 되는(하울링) 한 인간의 생애이지요."
그는 사람이 직접 실직했다고 말하기보다 다 먹지 못한 라면이나 주인을 잃은 밥솥을 바라볼 때 독자가 그 속에서 스스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고 부연했다.
"사회문제를 시가 직접 설명하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시의 절반은 시인이 가고, 나머지 절반은 독자가 걸어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표제시 <모서리>에서 시인은 "가슴을 녹여 틈새에 부어 맞춰보자"고 나지막이 건넨다. 효율과 속도만을 강요하며 사람을 모서리로 내모는 현대 사회에서 시인이 생각하는 연대와 가족의 의미는 '개조'가 아닌 '견딤'이다.
"모서리를 깎는다는 건 상대를 내가 편한 모양으로 바꾸겠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딱 맞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짜 연대는 모두 같은 모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모서리를 가진 채 그 사이의 틈을 가슴으로 메워주는 일입니다."
문단의 권위주의를 꼬집은 시(<전통詩장>, <매트릭스>)에 대해서도 2021년 등단한 '비문하(非門下) 시인'으로서 소신을 밝혔다.
바다이야기게임사이트
쉬운 언어로 호흡하는 시를 수준 낮게 치부하는 풍토에 아쉬움을 표하며, 서문시장의 바지처럼 몸에 잘 맞고 편한 시, 힘든 날 옆에 가만히 앉아주는 온기 같은 시를 쓰고 싶다고 전했다.
시인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
▲ ?도담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꽃과 나무를 함께 살피는 권병엽 시인과 아내 박영림씨.
ⓒ 홍영미
시인은 시를 쓰며 비로소 '울지 못하는 병'에서 벗어났다고 고백한다. 우리 시대 가장들이 그러했듯, 힘들어도 괜찮은 척 두려워도 태연한 척 억지로 용감해야 했던 세월이었다.
"시가 굳어 있던 제 가슴에 작은 틈을 내주었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 수도 있고,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쓸 수도 있게 되었죠. 시인이 되었다는 건 특별한 신분을 얻은 게 아니라,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게 가장 큰 자유입니다."
그는 가족의 짐을 지고 살아온 이 땅의 가장들에게 "이미 충분히 힘을 내며 살아왔으니, 가끔은 힘들다고 말해도 된다"며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이번 첫 시집에는 독특하게도 아내 박영림 씨의 시 <명퇴>가 한 편 함께 실려 있다. 자기 이름으로 내는 첫 결실이지만, 시인은 이 책이 온전히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 시로 아내를 설명하기보다 아내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할 자리를 내주고 싶었습니다.
모바일릴게임접속하기
부부는 두 권의 책이 아니라 오래 함께 제본된 한 권의 책 같거든요. 남의 시가 아니라 평생 제 모서리와 맞대고 살아온 사람의 시입니다."
불면증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 매일 밤 발을 주물러주는 일상에 대해서도 "사랑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습관이자, 식지 않도록 오래 지켜주는 온도"라고 말했다.
시집이 세상에 나온 후에도 팔공산 도담의 아침은 변함없이 평화롭다고 한다. 아침이면 마당의 사과나무를 보고 텃밭과 꽃들을 둘러보는 소탈한 일상이 계속된다고.
"시집이 나왔다고 일상이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아침이면 마당에 나가 사과나무도 보고, 텃밭도 둘러보고, 아내가 돌보는 꽃들도 기웃거립니다. 요즘은 '피는 것보다 지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꽃은 한순간에 눈에 들어오지만, 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오래 견뎌야 하니까요."
아내가 붙여준 호 '청안(靑安)'처럼, 시인은 앞으로도 나이가 들었다고 세상을 다 아는 척 철들지 않고, 늘 처음 보는 사람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당신의 모서리를 함부로 깎지 마십시오. 누군가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이 잘못된 모양인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은 이미 많은 사람이 기록하고 있으니, 저는 앞으로도 팔공산 도담에서 바깥쪽 모서리에 서 있는 사람들, 버려진 것들,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곁을 지키며 모서리를 기록하겠습니다."
이 내려앉는 팔공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