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폐허 속에서도 꽃이 피듯,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영화는 계속된다”
1950년대를 풍미한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의 대표 시 ‘목마와 숙녀’·‘세월이 가면’을 떠올리곤 한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큰 키에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명동 거리를 걸어 다녔던 인제 출신 박인환 시인은 술과 음악, 허무와 도시적 감수성을 시를 통해 노래하곤 했다.
누군가는 박인환을 시대정신을 잊은 채 술과 낭만에만 취해 있었던 인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낭만에 젖은 모더니스트로만 표현할 수 있을까.
오동진 작가는 인제에 자리한 박인환 문학관을 찾아가는 것부터 시작해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박인환 시인의 ‘영화 평론’에 주목한다.
명동백작들의 영화 이야기 오동진
저자는 영화평론가로서 박인환이 1956년 서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2년여 동안 남긴 59편의 영화평론을 징검다리 삼아, 시인이 머물렀던 1950년대 명동의 은성주.과 동방싸롱, 수도극장 등으로 향하며 시대정신을 추적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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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와 숙녀’에서 술의 힘을 빌려 내뱉는 절절한 상심과 ‘세월이 가면’의 담담하지만 쓸쓸한 음율은 박인환을 ‘청춘의 시인’으로 박제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평론을 통해 내다본 이면에는 누구보다 차가운 이성으로 은막의 세계를 탐미하던 격정의 비평가 박인환이 존재한다.
박인환의 또 다른 세계가 그간 낭만주의와 감상주의의 빛바랜 표류 속에 오래도록 봉인돼 있던 이유는 그 시절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박인환의 사회 참여적인 면모보다는 그의 낭만성과 서정성을 내세우는 것이 전후 반공의 남한 사회에 보다 어울리며, 본인들의 생존에도 유리하다는 문학계의 판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다만 의도적인 가림막 외에도 그의 비평적인 면모를 발견해 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시대를 향한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낸 김수영 시인과 박인환 사이의 갈등만 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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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정밀하게 복원해내는 박인환의 영화평론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슨 웰스의 ‘제3의 사나이’·조지 스티븐스의 ‘젊은이의 양지’·르네 클레망의 ‘저주받은 자들’·비토리오 데 시카의 ‘종착역’을 관통하는 박인환의 시선은 시대의 상흔을 직시하는 냉철함 그 자체다.
책은 시인의 우울한 시어 뒤편에 똬리를 틀고 있던 영화적 열망과 시대적 비판의식을 일깨워 그를 한국 비평사의 당당한 주역으로 재조명한다.
“박인환은 오슨 웰슨 주연의 ‘제3의 사나이’를 좋아했다. 비교적 높은 평。을 줬다. (중략) 아마도 박인환이 끌렸던 부분은 자아가 살해당하는 상황과 배신의 필연성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전향서에 서명하던 박인환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진다. 박인환은 ‘제3의 사나이’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땅에서 박인환이 느꼈을 피로감과 공허함, 그 속에서 낭만을 노래하면서도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책을 통해 독자들은 깊은 여운과 울림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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