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은 사촌 사이다. 두 사람의 할아버지가 1965년 사망하자, 남은 농지 한 필지는 1989년 상속인 13인 명의로 공동상속등기가 됐다. 이듬해 그 땅은 증여를 원인으로 손자인 을의 단독 명의로 정리됐다. 당시 을은 미성년자였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읜 을에게 그 땅은 사실상 유일한 유산이었다.
을은 직장에 다니며 주말마다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농협 조합원으로 가입해 비료와 농기구를 샀고, 재산세를 냈고, 두 차례 근저당권을 설정했다. 그렇게 25년이 흘렀다.
2015년 그 땅이 공공사업 부지로 수용되면서 을은 보상금 2억 6천여만 원을 받았다. 그러자 사촌 갑이 소를 제기했다. "등기만 을 명의로 했을 뿐, 땅의 일부는 내 소유로 하기로 약정했다. 보상금 중 8천만 원을 부당이득으로 반환하라."
그렇다면 갑은 35년 전의 구두 약속만으로 보상금을 나눠 받을 수 있을까.
입증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법률상 원인 없이 타인의 재산으로 이익을 얻고 이로 인해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이익을 반환해야 한다(민법 제741조). 갑의 청구는 이 조항에 기초한다. 그런데 을이 받은 보상금이 '법률상 원인 없는' 이익이 되려면, 그 전제인 '약정의 존재'가 먼저 증명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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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소송에서 권리의 발생을 주장하는 자는 그 요건사실을 증명할 책임을 진다. 약정이 있었다는 사실로 이익을 얻는 쪽은 갑이므로, 증명의 부담도 갑에게 있다. 그러나 35년 전 구두 약속을 뒷받침할 처분문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갑이 제출한 것은 가족 간 대화 녹취록이 전부였다.
법원은 '말'이 아니라 '25년의 행적'을 보았다
필자가 을을 대리한 이 사건에서, 법원은 약정의 존부를 판단하기 위해 당사자들이 지난 25년간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를 살폈다.
첫째, 재산세 부담이다. 갑은 을이 미성년자였던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세금을 낸 적이 없었다. 둘째, 을이 그 토지에 두 차례 근저당권을 설정하는 동안 갑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지분이 담보로 잡히는 상황을 방관할 권리자는 없다.
셋째, 결정적 서증이 있었다. 과거 갑은 을의 토지에 나무를 무단으로 식재했다가 항의를 받자, 을을 '토지 소유주'로 명시하며 수목의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자필 각서를 작성해 줬다. 토지의 일부가 자기 소유라고 믿는 사람이 상대방을 소유주로 인정하며 각서를 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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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약정이 있었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해 갑의 청구를 전부 기각했고, 항소심 역시 1심의 사실인정과 판단이 정당하다며 항소를 기각해 판결은 확정됐다.
실무상 시사.
첫째, 가족 간의 약속일수록 서면으로 남겨야 한다. 상속재산을 특정인 명의로 정리하면서 내부적으로 다른 합의가 있다면, 상속재산분할협의서 등으로 그 내용을 명확히 하고 서명을 받아둬야 한다. "가족끼리 무슨 문서냐"는 정서가 수십 년 뒤 분쟁의 씨앗이 된다.
둘째, 권리자는 권리자답게 행동해야 한다. 지분이 있다고 믿는다면 세금을 분담하고, 등기에 권리를 표시하며, 침해가 있을 때 즉시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장기간의 침묵은 법정에서 권리의 부존재를 시사하는 정황으로 읽힌다.
셋째, 개발과 수용은 잠자던 분쟁을 깨운다. 보상금이라는 목돈이 발생하는 순간, 잊힌 줄 알았던 옛 이야기가 소장이 되어 돌아온다. 최근 지역 개발이 활발한 충청권에서 유사한 상담이 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속이 개시됐다면 등기와 분할 협의를 미루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예방책이다.
승소 판결을 받아든 을 부부는 안도했지만, 그 안도에는 오랜 갈등의 피로가 함께 묻어 있었다. 가족 간의 소송은 이겨도 상처가 남는다. 가장 좋은 소송은 이기는 소송이 아니라, 애초에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된 소송이다. 그 예방의 도구는 결국 한 장의 문서다.
전희정 대표변호사(법률사무소 희승)
녹취록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