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박물관 야외 정원 언덕에는 팔각 지붕을 얹은 정자 음고정(吟古亭)이 자리하고 있다. 음고정은 1996년 개관한 경기도박물관 건립에 맞춰 세워졌다. 이후 용뫼산 자락에 들어선 백남준아트센터(2008)와 경기도어린이박물관(2011)의 개관, 용인경전철(2013)과 수인분당선(2020)의 개통, 경기도청사의 광교 이전(2022)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변화를 함께해 왔다. 지난 30년 동안 문화시설이 하나둘 들어서고 교통과 도시 환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 셈이다. 정자는 말이 없지만,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경기도의 문화공간과 도시 풍경이 변화해 온 시간이 겹쳐 보인다.
현판에는 '음고정(吟古亭)'이라는 세 글자와 함께 '임창순서(任昌淳署)'라는 글씨가 있고, 임창순인(任昌淳印)과 청명(靑溟)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현판의 글씨를 쓴 이는 청명 임창순(任昌淳, 1914~1999)이다. 한학자이자 역사학자, 금석학자이며 서예가였던 그의 글씨가 음고정의 현판과 주련에 남아 있다. '음고(吟古)'는 옛것을 읊는다는 뜻이다. 옛사람의 삶과 생각을 되새기고, 그들이 남긴 문물과 역사를 살피며 오늘을 돌아본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정자의 기둥에 걸린 주련에는 이러한 뜻을 헤아리게 하는 한시 여덟 구절이 담겨 있다.
구름과 안개가 감돌고 거목이 우거진, 유서 깊은 천년의 터전(雲沫喬木千年地), 웅장한 성곽을 갖춘 고을에는 수많은 백성이 모여 산다(城重雄州萬戶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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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에는 안개 자욱, 버드나무 그늘 짙게 드리워지고(野外浮煙和柳暗), 비 갠 뒤 남은 석양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와 밝게 빛난다(雨餘殘照漏雲明). 이 강산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현실이 참으로 통탄스럽고(江山痛恨分南北), 문물을 두루 살펴 고금의 변천을 헤아린다(文物周觀證古今). 명승지를 마주하니 깊고 맑은 흥취가 일어나고(勝地沈興淸興發), 옛사람을 아득히 추모하니 감회가 깊고도 길다(昔人緬想感懷長).
음고정 기둥에 걸린 주련 중 일부. "문물을 두루 살펴 고금의 변천을 헤아린다(文物周觀證古今)"는 내용이다. 사진=경기도박물관
여덟 구절은 자연경관에서 출발해 지역의 역사와 번영을 노래하고, 남북 분단의 아픔을 거쳐 문물에 대한 성찰과 옛사람을 향한 추모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반도의 분단된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자연과 역사, 현실에 대한 성찰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는 。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물을 두루 살펴 고금의 변천을 헤아린다(文物周觀證古今)"는 구절은 박물관의 역할과도 맞닿아 있다. 문물은 단순히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다. 한 시대의 생활과 기술, 예술과 사상이 담긴 역사적 증거다. 유물을 살펴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성찰하는 일은 박물관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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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고정의 주련은 이러한 태도를 짧은 한문 구절로 일깨운다.
현판과 주련 글씨를 남긴 청명 선생은 한학자이자 역사학자, 금석학자이며 서예가였으며 고전 연구와 교육에 힘쓰는 한편 시대의 현실에도 응답했던 지식인이었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60년, 4·19혁명 직후인 4월 25일 교수단 시위에서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의 글씨를 썼으며, 1963년에는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해 한문 고전 교육과 연구 인재 양성에 힘썼다. 고전을 통해 과거를 탐구하고 현실을 성찰했던 그의 삶은 '옛것을 읊는다'는 음고정의 이름과도 어울린다. 음고정은 전통 정자의 형식에 임창순의 시문과 글씨, 그리고 학문적 정신이 함께 깃든 공간인 셈이다.
문화유산은 반드시 오래된 건축물이나 지정문화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게 하는 공간, 그곳에 남겨진 인물의 흔적과 정신 역시 보존할 가치가 있다. 음고정의 현판과 주련, 청명의 삶, 그리고 박물관 주변의 경관을 함께 살펴보는 일은 우리가 무엇을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옛것을 읊는다'는 것은 과거에 머무는 일이 아니다. 문물을 두루 살펴 고금을 헤아리고, 옛사람을 생각하며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는 일이다. 30년 동안 주변의 변화를 지켜온 음고정이 앞으로도 경기도의 문화적 기억을 전하는 장소로 오래도록 남기를 기대한다.
박본수 경기문화재단 정책실 전문위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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