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복원한다는 것은 낡은 것을 새것으로 되돌리는 일이 아니다. 시간의 흔적을 품은 작품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로 건네는 일이다. 그렇기에 복원가가 재료를 고르는 일에는 작품의 오늘과 내일이 함께 담긴다. 작품에 맞는 재료를 고르고, 그 재료가 오랜 시간 작품을 지킬 수 있는지, 나아가 그 재료를 만드는 장인의 기술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김민중 보존 복원가는 그 답을 한국의 종이에서 찾고 있다. 그는 직지의 가치를 세계에 알린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와의 인연으로 문화유산의 길에 들어섰고, 파리 1대학에서 보존복원학을 공부한 뒤 루브르 박물관에 한지를 복원 재료로 도입했다. 그가 생각하는 복원과 보존의 의미를 들어봤다.
김민중 보존 복원가 ⓒ 한지수
▶ 어떻게 복원가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2001년에 프랑스에 와서 중학교부터 다녔고 대학에서는 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어요. 성인이 된 후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고 대사관에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박병선 박사님을 만났습니다. 처음 맡은 일은 프랑스 해군 장성의 손글씨 기록을 타이핑해 정리하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타이핑 일을 하다가 번역 일도 하게 되고, 나중엔 박사님 비서 일까지 하게 됐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공학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만큼 이 일에 깊이 들어와 있더라고요."
▶ 박병선 박사님에게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무엇인가요?
"처음 박사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가 아직도 기억나요. 엄청난 애연가셔서 사무실에 담배 연기가 가득했는데, 마치 꿈속에 들어간 것 같았죠. (웃음) 저에게 정말 강하게 남아 있는 인상은 박사님의 말년 모습이에요. 박사님은 여유로웠던 역사학자가 아니었어요. 얇은 지갑으로 연구를 이어 나가고 계셨죠. 그러던 중 박사님이 한국에 자료를 찾으러 가셨다가 쓰러지셨고, 암 말기인 것을 알게 됐죠. 프랑스로 돌아오셔서 박사님은 의사한테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좋으니 책 작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딱 1년만 더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셨습니다. 제가 이토록 역사학에 혼신을 다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박사님은 “이게 내 일인데 뭘”이라고 무심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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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직접 출간하시지 못한 작업 중이던 책은 유언에 따라 조카분이 마무리해 2013년에 나왔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 역사와 문화재라는 걸 보면서, 그 일이 얼마나 숭고한지 체감하게 됐습니다."
〈KBS 스페셜 - 의궤, 잃어버린 역사를 찾다: 박병선 박사〉(2013. 3. 31. 방영) 방송 화면. 故 박병선 박사(왼쪽)와 김민중 보존 복원가(가운데) ⓒ KBS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된 故 박병선 박사 ⓒ 김민중
▶ 루브르 박물관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파리 1대학에서 보존복원학 석사를 마칠 무렵인 2014년경 루브르에서 인턴을 했는데, 당시 루브르 복원실 응용연구 담당자이자 지류 보존복원 전문가인 아리안 드 라 샤펠(Ariane de La Chapelle)이 세계 수록지, 즉 손으로 만드는 종이에 관한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어요. 세계 여러 지역의 종이 가운데 문화재 복원에 적합한 종이를 찾는 연구였죠. 복원에서 종이는 주로 작품을 보강하는 재료로 쓰여요. 작품이 약해졌을 때 뒷면에 아주 얇은 종이를 붙여 손상된 부분을 보강하는 식이죠. 작품의 크기나 상태에 따라 종이의 두께와 강도도 다르게 골라야 하고요. 저는 당시 한지를 일본의 화지, 그리고 중국의 선지와 비교하는 석사논문을 제출한 직후였고, 아리안 드 라 샤펠의 추천으로 운이 좋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죠."
▶ 한지에 주목하신 이유가 있나요?
"복원 현장에서는 오랫동안 일본 화지가 주로 쓰여 왔고, 다룰 줄 아는 전문가도 많아요. 새로운 재료는 복원될 작품에 직접 영향을 미치니까, 복원가들이 익숙하고 검증된 재료를 선호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그런데 저는 박병선 박사님을 통해 한지의 우수성을 이미 확인했기에 한지가 복원 재료로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그래서 한지의 물성과 영구성을 연구했고, 작품마다 필요한 복원용 종이를 고르는 과정에서 한지를 도입하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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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책임감도 있었어요. 어느 누구도 다른 나라의 전통을 신경 써주지는 않잖아요. 한지를 복원가 동료들에게 알리는 건 한국인 복원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 한지가 루브르에 자리 잡기까지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2015년 군 복무 중에 국방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나흘간 루브르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막시밀리안 2세 책상 복원에 쓸 한지를 직접 고르기 위해서였죠. 얼마 뒤 부대에서 뉴스를 보는데, 프랑스에서 한지가 최초로 복원 작업에 쓰였다는 자막이 지나가더군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제대 직후에는 박병선 박사님 기일에 맞춰 루브르에서 아리안 드 라 샤펠과 함께 제1회 한지 컨퍼런스 <내일을 위한 어제의 종이>를 개최했어요. 그 후로 루브르에서는 복원에 한지를 지속적으로 쓰고 있어요. 현재 쓰이는 종이는 모두 외발식 한지로, 닥 섬유가 가로세로로 고르게 얽혀 있어 질기고 보존성 또한 높습니다."
김민중 보존 복원가의 작업실 ⓒ 한지수
▶ 올해 12월 한지의 유네스코 등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후에는 무엇이 중요할까요?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히 기쁜 일이죠. 하지만 등재 이후에 한지가 전통문화라는 이름 안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재료로 계속 쓰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지는 가볍고 튼튼하며 치수 안정성이 높아요. 습도 변화에 따른 수축과 팽창이 크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런 특성을 활용해 배터리 전극이나 우주·첨단·의학 소재와 관련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죠.
사실 저는 ‘한지’라는 이름보다 ‘고려지’라는 표현을 더 선호합니다. ‘한지’라는 명칭이 비교적 근대에 자리 잡은 데 비해, 고려지는 한지의 역사적 기원을 더 정확히 표현하면서 해외에서 Korean Paper로 바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물론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한지’라는 이름을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전문가로서는 우리가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정확한 언어로 이야기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AI를 이용해 한지 제작 기술을 보존하는 방법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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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장의 모션을 데이터로 확보하고 그 이용에 대한 라이선스는 한지장이 갖는 구조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만 종이의 성격을 결정하는 초지* 과정은 같은 방법을 배워도 스승과 제자의 종이가 다르게 나올 만큼 사람의 손과 경험에 달려 있어요. 장인의 동작을 기록하는 것은 기술을 이해하고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장인의 판단과 경험까지 전승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션을 기계로 재현하면 생산량은 늘겠지만 공장의 대량생산과 다를 게 없죠. 장인의 기술과 역할이 사라지면 한지는 금세 박물화되고 문화로서의 가치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데이터를 남기는 일과 사람이 기술을 이어받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에 풀어놓은 닥나무 섬유를 발과 발틀로 떠내 종이를 만드는 전통 공정
김민중 보존 복원가가 직접 돌보는 닥나무풀(황촉규) ⓒ 김민중
▶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한지로 세계의 문화재를 복원할 수 있는 길을 더 넓히고 싶습니다. 전 세계의 문화재 복원 작업에 한지가 폭넓게 쓰이는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모나리자도 한지로 복원되지 말란 법이 없죠. 그날을 위해서 보존 복원 연구와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려고 합니다.
2017년 루브르 컨퍼런스 당시 5년 안에 한지 장인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연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루브르에서 한지장 보호를 위한 협회 창단을 권유했고, 2019년 ‘미래에서 온 종이’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파리의 마레지구에 아틀리에를 마련해 루브르에서 한지가 갑자기 필요할 경우 조달할 수 있도록 한지를 보유하고 있어요. 결국 제가 하고 싶은 건 한지를 박물화된 전통 종이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 내일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살아 있는 재료로 만드는 것입니다."
김민중 보존 복원가가 작업실에서 복원용 한지를 선보이고 있다. ⓒ 한지수
좋은 복원은 과거를 그대로 되돌리는 일이 아니라, 과거의 가치가 미래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새로운 시간을 열어주는 일이다. 오늘 만들어진 한 장의 종이가 수백 년 뒤에도 작품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 김민중 복원가는 작품이 지닌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그 작품이 다음 세대와 만날 수 있도록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파리=한지수 미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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