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후 인천 제물포구 내리마루 문화쉼터에서 인천의재발견이 주최한 '보이지 않는 문자, 인천을 읽다' 프로젝트 현장에 전시된 참여 후기에는 '100주년 훈맹정음을 맞이하여 .자를 배워서 유익했습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안지섭 기자
。자는 비시각장애인도 함께 읽고 소통할 수 있는 우리의 언어다.
눈과 손으로 여섯 .의 배열을 짚어가다 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은 이웃의 불편을 알게 된다. 비시각장애인의 。자 읽기는 단순히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닌, 무심코 지나쳤던 도시의 차별을 함께 발견하며 허무는 작업이 아닐까.
인천일보는 한글 。자 '훈맹정음' 반포 100주년을 맞아 .자의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 사람들을 조명한다. 소중한 가족과 대화의 끈을 잇기 위해, 혹은 도시의 닫힌 길을 함께 열기 위해 '손끝의 언어'를 읽는 사람들. 그들의 사연은 저마다 달랐으나, 같은 세상에서 진정한 공존을 이루려는 지향。을 갖고 있었다.
▲"소통의 다리 되고파"… 。자 박물관 꿈꾸는 이민정 。역사
최근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에서 만난 이민정(28) .역사의 가방 속에는 표면이 울퉁불퉁한 달력과 동화책, 장난감 등이 가득했다. 모두 。자가 새겨진 물건들이었다. 외부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 평소 틈날 때마다 취미로 하나씩 모아온 개인 수집품이다.
이 。역사는 두 손에 미니카 3대를 올려 보였다. 작은 차체 위로 오돌토돌 솟아오른 .들이 눈에 띄었다. 시각장애인도 차량 정보를 손끝으로 읽을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장난감이다.
그는 "양 옆에 적힌 것이 자동차 모델명, 하부에 튀어나온 。자는 장난감 회사명"이라며 미니카를 설명했다.
이 。역사는 친구들 사이에서 '。친자(.자에 미친 사람)'로 불린다. 영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하지만, 。자에 가장 큰 애정을 쏟고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를 공부하게 된 건 20대 초반이었다. 병상에 누운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화하던 모습을 보던 아버지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가슴을 울리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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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는 귀도 어둡고 눈도 보이지 않으니 저런 대화조차 나눌 수 없겠다'며 안타까워하셨어요. 사용하는 언어는 같아도 감각이 닫히면 소통할 수 없다는 걸 처음 깨달았죠. 。자 교육을 받아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어요."
하지만 비시각장애인을 상대로 。자 교육을 운영하는 기관은 찾기 어려웠다. 시각장애인 사이에서라도 수업을 듣게 해달라고 문을 두드렸으나, 수업 방식이 다르다며 난색을 표하는 곳들이 많았다.
결국, 온라인 비대면 수업으로 배움을 이어간 끝에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역교정사 시험도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따내기도 했다.
첫 직장은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자도서관이었다. 일반 도서를 .자로 변환하는 .역 업무를 맡았고, 곧 영어 .역사 자격까지 취득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어 .자 강의도 진행했다.
그는 "첫 .역을 마치고 제본되어 나온 책을 손에 쥐었을 때 마치 내 자식을 품에 안은 것처럼 벅찼다"며 "어르신 교육생들이 활동지원사와 함께 길을 지나다 나를 발견하고 '우리 영어 선생님'이라고 반겨주실 때 느꼈던 보람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PL(프로젝트 리더)로 일하면서 국립국어원의 '묵자-.자 병렬 말뭉치 구축 사업'을 이끌고 있다. 묵자와 .자를 일대일로 짝지어 모아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일이다. 이 데이터는 국립국어원에 납품되며, '모두의 말뭉치'라는 누리집을 통해 언어 연구·교육부터 인공지능 기술 개발의 자원으로 다양하게 활용된다.
현장에서 마주하는 .역의 세계는 단순한 문자 치환을 넘어선다. 그는 ".역은 번역기를 돌리듯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을 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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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별표(★)나 하트(♥) 같은 특수기호는 현행 한글 .자 규정에 뚜렷한 표기법이 없어 .역사가 상황에 맞게 고민해 표기해야 한다"며 "단순한 서식 기호라면 다른 부호로 대체할 수 있지만, 문맥상 특별한 의미를 지닐 때는 독자에게 이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고민을 거듭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수집품으로 '。자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오랜 꿈을 간직하고 있다.
".자를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시각장애인에게도 널리 알리고 싶어요. 비장애인들이 .자에 관심을 가져야 일상 속 잘못된 。자 표기를 찾아내 바로잡을 수 있고, 관련 제도의 미비.도 개선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일상 속 。자를 밝히다…인천 시민들의 대장정
'훈맹정음'의 고향 인천에서는 올해 .자를 공부하고 .검하며 배리어프리(barrier-free, 무장애) 도시를 상상해보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결실을 맺었다. 비영리 시민단체 '인천의재발견'은 지난 14일 오후 '보이지 않는 문자, 인천을 읽다' 프로젝트의 5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결과공유회를 열었다.
5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천 시민 10여명은 .자 기초 교육을 이수하고, 송암박두성기념관과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탐방한 후 관공서·지하철역·마트 등을 돌아다니며 지역 곳곳에 설치된 .자들을 살폈다.
이날 제물포구 내리마루 문화쉼터에 모인 시민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현장을 누비며 느낀 。들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스크린 화면에 그동안 활동했던 사진이 나오자 웃음꽃이 피면서도, 도시 곳곳에서 발견한 오류들을 보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응시하기도 했다.
14일 오후 인천 제물포구 내리마루 문화쉼터에 인천의재발견 '보이지 않는 문자, 인천을 읽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책자에는 지난 5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간 시민들이 인천 대형 마트와 관공서, 지하철 등을 조사하며 발견한 주요 오류와 느낀。 등을 담고 있다. /안지섭 기자
실제 마트 매대와 역사를 발로 뛴 이들의 증언에는 생활 속 문제.이 생생하게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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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48) 씨는 ".자가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제법 많았다"면서도 "기업들이 제품에 。자 표기를 늘려가는 추세지만 막상 읽어보면 오타가 적지 않았다. 생산 단계부터 시각장애인 당사자나 전문가의 꼼꼼한 검수를 거친다면 훨씬 완성도 높은 。자가 될 것"이라고 짚었다.
또 ".자의 위아래가 뒤집히거나 상·하행 안내가 반대로 붙는 사례가 보였다"며 ".자 스티커 설치 인력이 대부분 비장애인이다보니 그런 것 같다. .자 옆에 한글 묵자를 함께 적어두면 확인하기 쉽고, 일반 시민들도 오류를 발견해 제보할 수 있을 듯 하다"고 제안했다.
디지털 시대의 첨단 기술도 정작 손끝의 언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는 체험담이 나오자 장내에는 깊은 공감의 탄식이 번졌다.
그는 "생성형 AI로 。자 사진을 촬영하니 주변 상표 이미지를 보고 내용을 임의로 유추해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다"며 "인터넷에 떠도는 .자 일람표에도 비표준 오류가 섞여 있었다. .자에 대한 정보는 많지만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5개월의 시간은 단순한 거리 탐방에 머물지 않았다. 。자를 깊이 있게 공부한 시민들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꿈이 싹트기도 했다.
김은정(54) 씨는 "학습 과정에서 。자 그림책이나 국가고시 시험지 등 사람의 손을 거쳐 。역해야 할 수요가 여전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개인적인 배움을 넘어 사회적으로 필요한 영역에 기여하기 위해 。역교정사 자격증 취득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은조(46) 씨도 "인천에 살면서도 송암 박두성 선생의 업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오디오북 봉사활동을 해보고 싶다"고 전했다.
한편, 이 프로젝트를 주관한 전미경 인천의재발견 대표는 "시민들이 스스로 문자의 원리를 배우고 도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소중한 계기였다"며 "훈맹정음 100주년을 맞아 반짝 관심을 두고 끝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일상 속 장벽을 낮추는 지속적인 실천 방안을 찾아가려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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