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여행으로만 유럽을 경험하셨나요. 매월 연재하는 '숨은유럽찾기'에선 평온한 관광지에선 볼 수 없는 유럽 각국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 드립니다. 드러난 뉴스의 이면도 들여다봅니다. 때론 불편한 진실이 우리에게 피와 근육이 됩니다.
10월 8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도심에서 마리카르멘 아바스칼(87)을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아바스칼이 살던 집에서 강제 퇴거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스페인 전역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그는 퇴거 2주 만에 세상을 등졌다. 마드리드=AP 연합뉴스
“더 이상 제2의 마리카르멘 아바스칼이 나와선 안 된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 관광객이 몰리는 도심 한복판에서 한 달째 같은 구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 달 전 마리카르멘 아바스칼이라는 87세 노인이 70년 동안 살았던 아파트에서 강제 퇴거당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광장 주변에 텐트를 쳤고, 그렇게 시작된 ‘텐트 시위’가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한 것이다.
1956년 아버지가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 아파트에서 안정적으로 거주했던 아바스칼은 2018년 집주인이 바뀌면서 위기를 맞았다. 개인 소유였던 아파트를 투자 펀드 회사인 우르바게스티온이 매입하면서 월세를 500유로(약 75만 원)에서 2,650유로로 올린 것. 이후 조정 끝에 1,650유로로 인하됐지만 기존의 3배가 넘는 월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아바스칼은 1956년 아버지가 맺은 임대차 계약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버텼다. 이에 회사 측은 “아바스칼이 부모로부터 양도받은 계약은 무효”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2023년 대법원이 아바스칼의 손을 들어준 1심 판결을 뒤집으면서 최종 승소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9월 23일, 경찰이 그의 자택 앞에서 퇴거를 막던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고 들것에 실린 아바스칼이 30분 만에 퇴거 조치되는 모습이 매스컴을 타면서 민심이 폭발했다. 최근 10년간 80%나 오른 스페인 월세에 허덕이는 시민들 입장에서 아바스칼의 사례가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시위는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등 전국적으로 번졌고 이들은 “세입자 보호 강화”와 “강제 퇴거 금지”를 촉구했다. 전국적인 분노 물결에 놀란 펀드 회사는 곧바로 임대료 인상을 철회했지만 아바스칼이 퇴거 2주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시위대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조기 총선’ 승부수 던진 산체스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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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칼 강제 퇴거 사건’에 스페인 정치권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는 곧바로 △취약계층 세입자의 퇴거 절차를 2030년 말까지 유예하고 △세입자가 신청하면 기존 계약을 최대 2년 연장하며 △연간 임대료 인상을 최대 2%로 제한하는 등 임대료 상한제를 포함한, 세입자 보호 강화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다수 의석을 .한 극우 정당 복스 등 우파 진영에 의해 법안 통과가 좌절되자 산체스 총리는 급기야 조기 총선 승부수를 던졌다. 지난달 5일 “주택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법안이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해 의석을 더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다”며 2027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11월 29일로 앞당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즉 세입자 보호 강화 법안을 처리할 테니 총선에서 사회당에 표를 달라는 메시지다. 다수당이 되면 법안을 쉽게 통과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시위대 역시 산체스 총리가 이끄는 좌파 진영이 승리해 제도가 개선되길 바라고 있다.
세입자 연합과 노동조합은 이달 11일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를 예고했다. 최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등지에서 확산된 고물가 항의 집회와 맞물리며 확산될 조짐도 보인다. 그러나 스페인이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는 뜨거운 논쟁 거리로 남았다. 산체스 내각과 좌파 진영이 주장하는 임대료 상한제가 만병통치약이 아닐 수 있어서다.
70년간 월세 동결 가능했던 이유
한 달 넘게 이어지는 시위대 요구를 아바스칼 사례에 다시 적용해보면, ‘강제 퇴거 없이 기존 월세인 500유로로 영구 거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문제는 500유로가 사실상 70년간 동결된 월세에 가깝다는 것이다. 오늘날 시장 임대료와 큰 차이가 크다. 1956년에 아바스칼 아버지가 맺은 계약은 어떻게 2026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답은 당시 강력한 임대차 보호법에 있다. 1939년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은 전후 주택 부족과 물가 상승으로부터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임대료를 사실상 동결하고 종신 계약에 가까운 계약 갱신과 무제한 가족 승계를 보장했다. 정권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선심성 정책을 편 것이다. 이에 아바스칼은 ‘아버지(1960년 사망)→어머니(2005년 사망)→본인’으로 이어지는 계약 승계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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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94년 임대차법이 개정되면서 승계 횟수와 자격에 제한을 둔 것이 변수가 됐다. 개정법에 근거해 대법원은 2005년 아바스칼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승계에 하자가 있다고 판단했다. 과거 강력한 임차인 보호제도하에서 맺은 오래된 계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사이 임대료 상한제는 스페인 전역이 아닌 임대료 부담이 큰, 주거 긴장 지역에 한해 적용하는 것으로 축소됐다. 다만 법 개정 전에 맺은 계약의 효력은 지속됐다. 만약 아바스칼이 1994년 이전에 어머니로부터 승계를 받았거나 대법원이 2005년 승계를 인정했다면 500유로로 계속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강력한 임대료 상한제 도입한 유럽 국가들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국적으로 임대료 상한제를 적용하는 유럽 국가들이 있다. 세입자의 과실 혹은 집주인이 입주하는 경우가 아니면 무기한 계약을 보장하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월세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스페인 좌파 진영은 이 제도에 주목하고 있다. 집주인이 바뀌어도 기존 계약이 유지돼 제2의 아바스칼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다. 실제 좌파 성향 지역 정당인 ‘마스 마드리드’는 지난해 무기한 임대를 표준 계약으로 장려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산체스 총리가 이끄는 사회당이 29일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면 이 같은 강력한 제도를 도입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최근 임대료 상한제의 성급한 확대를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호르헤 갈린도 스페인 에사데 경영대학원 산하 경제정책센터 소장은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산체스 정부의 법령은 기존 세입자를 보호하는 것과 아직 거주지를 찾지 못한 신규 세입자를 보호하는 것 사이에 상충 관계를 만들어낸다”고 꼬집었다. 임대료 상한제가 의도하지 않은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 세입자만 보호, 신규 세입자엔 장벽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이른바 ‘록인 효과(lock-in effect)’다. 시장 임대료가 크게 올라 기존 세입자가 살던 집에 계속 눌러앉으면서 신규 세입자는 집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년 전, 방 세 칸짜리 아파트를 월세 1,000유로에 얻은 노부부는 자녀가 출가하자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려고 한다. 그러나 임대료가 급상승하면서 작은 집 월세는 1,500유로가 됐다. 이에 새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보다 10년 전 월세로 살 수 있는 현재 집에 머무는 것이 이득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인터넷 바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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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홀로딜린 독일경제연구소(DIW) 연구원은 2024년 보고서에서 “임대료 상한제가 기존 세입자는 보호하지만 신규 세입자에게 커다란 장벽을 만들고 있다”며 “고령의 과부가 임대료 규제 대상인 넓은 아파트에 장기간 혼자 거주하는 반면 큰 집을 찾는 대가족은 집을 구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실제 사회주택 비율이 높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네덜란드에선 신규 세입자가 집을 구하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베를린에선 아파트 매물 한 채에 수십 명이 대기하는 건 기본이고 면접도 수차례 봐야 한다. 이에 ‘집을 구한다’는 전단지를 직접 길거리에 붙이고 다니는 청년들이 늘었다.
공급 위축시키는 부작용도
임대료 상한제가 임대주택 공급을 위축시킨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럽의 경영대학 ESCP와 프랑스 툴루즈경제대학 소속 연구진이 2020년 9월부터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60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된 임대료 상한제 영향을 분석한 결과, 초기에는 임대료가 5% 낮아지는 효과가 있었지만 1년 후에는 임대주택 공급량이 30~32% 감소했다. 기존 임대료와 시장 임대료 간 격차가 벌어지자 대출이자, 보험료, 유지보수비를 월세에 반영하기 어려워진 집주인들이 아예 집을 팔아버리거나 임대 매물을 내놓지 않게 된 것이다.
산티아고 카르보 발베르데 쿠네프대 경제학과 교수는 “임대료 상한제는 기존 임차인을 과보호하고 공급을 줄이면서 새 집을 구하려는 젊은이, 가정을 꾸리려는 부부, 직업을 위해 이주해야 하는 노동자 등 신규 세입자와 기존 세입자 간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꼬집었다.
임대료 규제 완화한 아일랜드
이러한 부작용을 체감한 아일랜드는 올 3월 임대료 상한제 규제를 완화했다. 신규 임대차 계약 6년 후에는 시장 가격만큼 임대료를 올릴 수 있게 허용한 것이다. 아일랜드 정부는 해당 조치가 “시장의 균형을 맞추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기존 세입자의 임대료는 7% 상승에 그친 반면, 신규 세입자 임대료는 47% 올라 주거 이동성을 방해하는 불균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임대료 규제가 신규 주택 건설 등 주택 공급을 막는다는 우려도 반영됐다.
홀로딜린 연구원은 “과거 집주인이 월세를 마음대로 올리지 못하게 해 세입자의 주거 안정을 꾀했던 임대료 상한제가 오늘날에는 사회에 이롭기만 한 정책인지 단정하기 어렵게 됐다”며 “정부가 제도의 다양한 효과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비용과 편익을 평가하지 않으면 역효과만 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시장 가격만큼 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