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이 들기 전에 한라산 등반해 보고 싶다. 제주도에 갈 때면 어디서든 보이는 한라산이 참 신비로워서 한번은 꼭 가보고 싶었어."
"그래. 나도 한라산 등반 하고 싶어. 가을에 가자."
지난 한글날 연휴(9~10일)에 우리 네 형제는 부부 동반으로 한라산에 다녀왔다. 육십 고개를 코앞에 둔 큰언니가 한라산 등반 이야기를 꺼냈고 동생 셋이 그 뜻에 흔쾌히 동참하면서 현실화 되었던 것.
비행기 예약은 큰언니가 서둘러서 순조로웠다. 숙소인 휴양림과 한라산 등반 예약은 전쟁이 따로 없었다. 예약 시작일이 둘 다 9월 1일 9시였다. 대부분의 휴양림 예약은 숲나들e 사이트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접속하여 선착순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동시 접속자가 엄청나다. 조카까지 동원해서 애썼건만 붉은오름휴양림은 실패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교래자연휴양림 12인실을 예약했다.
우리가 예약할 당시 한라산 탐방은 성판악 코스만 가능했다. 시스템에 성공적으로 접속해도 자꾸만 에러 메시지가 떠서 포기하려던 찰나에 운 좋게 예약할 수 있었다.
"어렵게 예약했으니 꼭 등반해요."
막내인 올케가 말했다. 장시간 등반을 해본 적 없는 우리 자매 셋은 "자신이 없지만 도전해 보자. 가다가 안 되면 내려오면 되지" 하면서 등반 날까지 각자 체력 단련에 힘쓸 것을 다짐했다.
10시간 걸려 한라산 등반에 성공하다
8일 저녁 비행기로 제주에 도착했다. 가볍게 저녁을 먹은 후 로컬 매장에서 내일 산행을 위해 필요한 먹거리를 장만했다. 숲 속에 고요히 잠든 교래자연휴양림에 도착해 씻고 다음날 등반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드디어 한라산 등반일 아침. 큰형부는 새벽 4시 30분부터 일어나서 부산을 떨었다. 우리는 아침으로 바나나, 사과, 달걀, 요거트, 빵을 조금씩 챙겨 먹었다. 등반하면서 먹을 간식으로 감말랭이, 대추칩, 곶감, 초콜릿, 밤, 오이, 물을 개별 배낭에 챙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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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둘러 성판악 입구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임에도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했다. 이제는 .심으로 먹을 김밥을 찾으러 가야 했다. 그런데 아뿔사 웬 걸. 바로 입구에 있는 줄 알고 주문했던 김밥 가게는 주차장에서 왕복 30분 거리에 있는 게 아닌가. 야무진 올케를 100% 믿고 아무도 확인 전화를 해보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김밥을 가지러 갈지, 취소할지 의논 끝에 결국 김밥을 포기하였다. 그렇게 간식만을 믿고 평소에 등산을 즐기지 않는 우리 가족의 한라산 등반이 시작되었다.
입구에서 신분증과 큐알코드를 확인한 후 한라산에 입장했다. 어두운 밤의 잔영이 숲을 덮고 있었다. 희미한 여명 속에 고요히 잠든 나무와 돌, 산길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겼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쌀쌀한 아침 공기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탐방길은 둘레길처럼 완만하여 산책하듯 편안했다. 오랜만에 걷기 명상 속으로 깊숙하게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간 산길을 오르니 .。 숲과 나무가 선명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키 큰 나무들 아래에는 키 작은 조릿대가 빼곡하게 숲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수시로 심호흡을 했다. 비염이 있는데, 한라산 공기를 마시니 숨이 편안해지고 콧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속도를 조절하며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쉼터인 속밭대피소, 진달래대피소에서 충분히 쉬었다. 탐방로는 누구나 편하게 걷기 좋도록 단단한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현무암이 울퉁불퉁 노출된 산길도 있었지만 등반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적당했다.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크게 힘들지 않았다. 가족들과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하늘과 나무를 눈에 담고, 사진을 찍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상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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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라산과 백록담, 새파란 가을 하늘, 두꺼운 구름띠에 가려진 제주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외국인 등산객들도 많았다.
▲ ?정상에는 한라산과 백록담, 짙은 구림이 제주의 하늘을 덮고 있는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 이정미
"우와! 백록담이다!"
"하하. 저 모습 보고 '우와' 소리가 나와? "
"그래도 날씨가 좋아야 백록담을 볼 수 있다고 하잖아. 본 것만 해도 행운이지."
남동생이 분화구 밑바닥에 눈물만큼 물이 고여있는 백록담 모습을 보며 말했다. 한라산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를 바꾸기 때문에 선명하게 백록담 얼굴을 보기 쉽지 않다고 했다. 한라산과 백록담이 우리에게 말간 맨얼굴을 보여주어 정말 기뻤다.
▲ ?백록담을 내려다 보며 찍은 사진. 날씨가 좋아서 백록담을 본 것만으로도 기뻤다.
ⓒ 이정미
▲ ?한라산 정상. 하늘과 구름이 유난히 예뻤다.
ⓒ 이정미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더 힘들다. 모두 나이가 나이인 만큼 무릎 통증을 느꼈다. 울퉁불퉁 돌길은 자주 발걸음을 붙잡았다. 게다가 .심도 간식으로 간단하게 해결했으니 더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남동생은 "이렇게 먹을 것을 갈구해 본 적이 10년 만에 처음인 것 같다"며 헛헛한 웃음을 보였다.
한라산 탐방은 보통 7시간에서 8시간이면 완주한다. 우리는 6시 10분에 출발해서 오후 4시 10분에 주차장에 도착했으니 꼬박 10시간이 걸렸다. 하루 10시간 걷기는 우리 가족 모두가 난생 처음하는 경험이었다. 등반을 마치고 나니 마음 안에서 커다란 뿌듯함이 솟아났다. 모두 무사히 한라산을 온몸으로 느꼈고 품었다. 그렇게 또 우리는 가족의 잊을 수 없는 추억 앨범 한 장을 채웠다.
산을 내려와 가까운 해수탕에서 땀을 씻고 짧은 피로를 풀었다. 개운해진 기분으로 서둘러 허기진 배를 채우러 제주 흑돼지 구이를 먹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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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반찬'이라 우리는 정말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와흘메밀마을과 함덕해수욕장의 가을빛
제주에 오기 전, 어느 기사에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나온 메밀밭 정경을 보았다. 메밀꽃이 한창일 때 맞추어 제주에 오기도 쉽지 않은 만큼 제주의 메밀밭을 보고 싶었다. 어제 산행을 한 뒤라 남은 여정은 편안하고 여유롭길 바랐다.
교래자연휴양림에서 가까운 '와흘메밀마을'에 갔다. 차에서 내려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감탄이 절로 쏟아졌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표현처럼 하얀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 。。이 무리지어 큰 물결을 이루었다. 약 10만 평라니, 정말 광활했다. 마치 하얀 꿈이 끝없이 펼쳐지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만든 메밀묵은 정말 끝내줬는데.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지."
기억력이 좋은 작은 언니가 엄마의 깔끔하고 담백했던 메밀묵을 소환했다. 우리는 유별나게 깔끔했던 엄마를 추억했다. 엄마의 새하얀 수건, 반짝반짝 빛났던 하얀 냄비에 이르기까지.
▲ ?끝없이 펼쳐지는 메밀꽃밭 모습
ⓒ 이정미
하얀 꽃이 끝없이 펼쳐지며 먼 하늘과 맞닿은 모습을 바라보았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장돌뱅이'와 '동이'의 애잔한 삶이 그려지는 거다. 아름다운 것은 왜 쓸쓸하고 슬프기도 할까.
마지막 여정은 '함덕해수욕장'이었다. 제주를 떠나기 전에 바다를 보고 싶었다. 해수욕장은 여름에 비해 한산했다. 해변에는 버스킹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은 저마다 평화로운 한때를 그려내고 있었다. 우리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찰랑찰랑 옥빛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는 모습은 얼마나 예뻤던지. 사람과 바다가 어우러진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 ?함덕해수욕장
ⓒ 이정미
중년의 버스킹 가수는 가을 노래를 불렀다. <가을 편지>였다. 귓가를 방문하는 노랫말에 괜스레 감상에 젖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한글날 연휴 제주 여행 앨범 끝장이 채워졌다.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나를 받아주오.
소금을 뿌린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