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중심 서사가 지배하는 대학로에서 여배우들의 자리는 늘 좁았다. 어머니, 아내나 애인, 혹은 비극의 희생양으로 소비되는 ‘기울어진 무대’를 바로잡겠다며 나선 이는 역설적이게도 한 남성 배우였다. 2019년 동료 여배우들에 대한 부채감으로 사비를 털어 ‘여주인공 페스티벌’의 닻을 올린 원종철(47) 극단 ‘행복한 사람들’ 대표다.
숱한 오해와 재정난 속에서도 축제를 지켜온 그의 헌신은 대학로의 소중한 플랫폼으로 인정받으며 문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2년 만에 다시 닻을 올려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30일까지 미마지아트센터 물빛극장과 서울연극센터 라운지홀에서 제6회 여주인공 페스티벌이 열리는 가운데, 최근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원 대표를 만나 여배우를 위한 무대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를 들었다.
지난달 30일 대학로 물빛극장에서 원 대표가 제6회 여주인공 페스티벌 개막을 선언하는 모습. ⓒ여주인공 페스티벌
“연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극단의 여성 선배들이 ‘작품에 여성 배역이 너무 없다’ ‘역할이 있어도 소모적이다’라고 토로하는 것을 곁에서 늘 들었어요. 후배인 제가 선배들보다 상대적으로 큰 배역을 맡는 것에 안타까움과 부채감을 느꼈죠. 그러던 중 2018년 우연히 OTT에서 한국 영화 ‘V.I.P.’를 보게 됐습니다. 기라성 같은 남성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작품인데, 가장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가 끔찍한 폭력을 당한 뒤 시체로만 다뤄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부조리함을 보며 ‘여성이 온전한 주체이자 주인공으로 서는 연극 축제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해 2019년 제1회 여주인공 페스티벌을 열게 됐습니다.”
여배우 주연 서사를 위한 독립된 무대
대학로에 ‘여성연극제’나 ‘페미니즘 연극제’ 등이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지만, 여배우 주연 서사를 위해 독립된 무대를 마련했다는 。은 여주인공 페스티벌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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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 자격은 창작극과 번역극 구분 없이 최소 3명 이상 출연해야 하며 여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작품이어야 한다. 공모를 통해 최종 4~5편을 선정하며, 공정성을 위해 매년 심사위원을 새로 위촉하고 원 대표 본인은 심사에서 빠진다.
개막작 ‘늙은 여자, 아쿨리나’. ⓒ여주인공 페스티벌
올해는 창작집단 일각의 ‘늙은 여자, 아쿨리나’를 시작으로 극단 그릿807의 ‘STAY TUNED-빈처2026’, 극단 콘티의 음악극 ‘희재’,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이혼고백서’가 무대에 오르며 토크쇼 ‘나는 여배우다’가 대미를 장식한다. 어엿한 축제로 자리 잡은 지금과 달리 닻을 처음 올렸던 2019년 당시 주변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남성 배우 출신 극단 대표가 왜 갑자기 저런 걸 하느냐’ ‘페미니즘을 앞세워 돈벌이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 섞인 시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축제의 운영 원칙은 명확했습니다. 주최 측인 제 수익은 ‘0원’이었고, 티켓 수입의 90%는 참가 극단에 정산해 줬으며 나머지 10%는 한국연극인복지재단에 기부했습니다. 1회 때 받은 최소 참가비(팀당 30만~35만원)조차 2회부터는 완전히 없앴고, 극장 무료 대관과 상금, 제작 지원금을 주최 측에서 전액 마련했습니다. 이 같은 진정성이 입증되자 초기에 비판적이던 분들도 마음을 열고 응원해 주셨습니다.”
건설 노동·레커차 기사로 비용 마련
사비를 털고 빚을 져가며 무대를 지켜온 그의 뚝심 뒤편에는 연기를 향한 지독한 애정이 있다. 정작 그 시작은 우연이었다. 고교 시절 친구를 따라간 연극반에서 연기의 매력에 눈을 떴다. 1998년 대학 대신 대학로를 택한 그는 스무 살에 박장렬 연출가의 ‘극단 반’에 입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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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2014년 마음 맞는 동료 8명과 함께 ‘사회적 가족이자 집’ 같은 울타리를 꿈꾸며 극단 ‘행복한 사람들’을 창단했다. 인간 본질을 들여다보는 휴머니즘 연극을 지향했으나 극단 운영은 쉽지 않았다. 배우보다는 프로듀서 역할에 치여야 했다. 그는 “제작비가 부족해 외부 연출가를 섭외할 여유가 없자 단원들의 제안으로 연출봉을 처음 잡기도 했다. 지금까지 4편가량을 연출했다”며 웃었다.
1회 페스티벌에 참여한 배우·연출가들. ⓒ여주인공 페스티벌
2018년 극단 진일보의 연극 ‘바보 햄릿’(김경익 연출)으로 서울연극협회가 주관하는 ‘서울연극인대상’ 연기상을 거머쥐었을 때만 해도 주변에서는 “남자 배우는 40대부터가 진짜 꽃”이라며 축하를 건넸다. 그러나 2019년 여주인공 페스티벌을 출범시킨 뒤 극단 운영 적자에 축제 사비 부담까지 겹치면서 재정난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그는 좋아하는 무대를 잠시 내려놓고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이어 보험회사 긴급출동 견인차(레커차) 기사로 밤낮없이 일하며 번 돈은 극단 빚을 갚고, 다시 여주인공 페스티벌을 지켜내는 밑천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5회 때 토크쇼 ‘나는 배우다’ 한 장면. ⓒ여주인공 페스티벌
4회까지 회당 수천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거의 사비로 감당했던 그는 다행히 5회째인 2024년 서울시 민간 축제 지원 사업에 선정돼 약 4900만원(자부담금 제외)의 지원금을 받았다. 하지만 누적된 피로와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5회 페스티벌을 끝으로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양성평등문화지원상 수상에 큰 용기
“지원금을 받긴 했지만 그동안 쌓인 빚이 워낙 많았던 데다, 당시 극단 연극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연출·제작까지 겹치면서 신체적·재정적 한계에 부딪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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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축제를 챙기느라 가정을 거의 돌보지 못했기에 최소 2년은 삶을 추스를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아를 병행하며 배움에 대한 갈증을 풀고자 대학원에도 진학했고요.”
재충전을 위해 잠시 멈췄던 그는 마침내 올해 축제를 재개했다. 6회째인 올해 서울시 민간 축제 지원 사업에 재선정된 데다, 지난해 ‘2025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지원상’을 받은 것이 큰 계기가 됐다. 그는 “(수상은) 지쳐 있던 내게 지난 5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 전환。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축제를 계속 이어가야겠다는 용기가 솟았다”고 회고했다.
여주인공 페스티벌은 여성을 둘러싼 삶의 주체성을 조명하는 축제로서 정체성을 확립했지만 ‘지속 가능성’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에 원 대표는 올해부터 축제 운영 경험이 풍부한 배우 출신의 이훈경 극단 제자백가 대표를 총괄 프로듀서로 영입해 조직을 전문화했다. 앞서 3회부터는 대상 수상작이 ‘부산 세계여성공연예술축제’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연계 시스템도 갖췄다.
축제 조직 전문화? 올해 배우로 복귀
“주변에서 참가팀과 티켓 수익을 나누거나 지원금을 남겨 이듬해 운영비로 적립하라는 조언도 건넸습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무대를 지키는 창작자들의 몫을 떼어내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프로듀서로서의 제 한계를 인정하고, 개인이 아닌 다 함께 뒷받침하는 시스템으로 축제의 틀을 전환했습니다.”
극단 빚을 갚으며 축제 운영비를 벌기 위해 무대를 떠나야 했던 원 대표는 마침내 본업으로 돌아왔다. 20년간 100여편에 출연했던 베테랑 배우인 그는 올해 극단 반 창단 30주년 기념 공연 무대에 오르고 독립영화 촬영까지 마쳤다.
“극단 대표나 페스티벌 총감독이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버티는 자리라면, 무대에서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제 영혼이 숨을 쉬며 온전한 행복을 느낍니다. 앞으로 극단과 페스티벌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제 역할을 다하는 한편, 배우로서도 꾸준히 무대를 지키고 싶습니다.”
선배들이 ‘작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