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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우리나라에 대해 새삼 실감하는 게 있다. 우린 다른 나라와 맞닿은 육상 국경선이 없다는 것, 거의 모든 국민이 하나의 언어를 쓴다는 것, 거의 모든 국민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 나에겐 워낙 당연한 일이라 평소엔 느끼지 못하다가, 다른 나라에서 조금 오래 지내다 보면 갑자기 그 차이가 확 다가오는 것이다. 이런 순간 여행이 한 겹 더 두텁게 흥미로워진다.
태국 불교 사원의 거울 타일 장식 / 사진. ⓒ신예희
태국은 어떨까? 휴대폰의 지도 앱을 열어보자. 영토가 남북으로 무척 길게 뻗어 있고, 미얀마와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웃 나라와 문화적으로 많은 것을 공유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게 당연하겠다. 인구 구성은 타이족이 80%가량을 차지하고, 중국계와 말레이계, 인도계가 뒤를 잇는다. 그러니 이 커다란 나라를 여행하면서 콕 집어 태국만 보고 듣고 맛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마음을 열고, 여러 문화를 한껏 느낄 신나는 기회다.
시크교 사원의 예배 / 사진. ⓒ신예희
아침 식사부터 시작해 보자. 심지어 무료 식사다. 방콕 파후랏의 시크교 사원 스리 구루 싱 사바(Sri Guru Singh Sabha Gurdwara)에선 국적도, 종교도, 성별도, 신분도,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아침 식사를 대접한다. 이걸 랑가르(Langar)라고 한다. 전 세계 시크교 사원에선 모두 랑가르를 베푼다. 특정 기간에만 열리는 행사가 아니라 매일의 일상으로, 애초에 랑가르를 할 수 있는 조리 시설과 식사 공간이 있어야만 사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단다.
식판에 음식을 자유롭게 담는다 / 사진. ⓒ신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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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음식뿐 아니라 팟타이도 있다 / 사진. ⓒ신예희
사원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1층에선 아침 기도가 한창이다. 널찍한 홀에 깔린 아름다운 패턴의 카펫 위에 사람들이 양반다리로 앉아 있다. 태국의 인도계 인구는 20만 명에 달하는데, 그중 절반이 시크교도다. 잠시 사이에 끼어 앉았다가 살금살금 랑가르가 열리는 2층으로 올라가 본다. 줄 서서 식판을 받아 음식을 담는데, 담백한 로티 빵과 콩, 감자 등으로 만든 살짝 매콤하고 구수한 커리, 코코넛 밀크 소스 등이 오늘의 메뉴다. 유제품을 허용하는 채식 요리다. 달콤한 밀크티까지 한 잔 받아 들고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아 편히 식사하면 된다. 테이블과 의자가 없고 바닥에 앉는데, 모든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으며 시크교의 중요 교리인 평등을 되새기는 거란다.
황송하고 감사하다. 난 그저 호기심에 한번 와본 것뿐인데, 매일 이른 아침부터 이 음식을 다 준비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절대 남기지 말고 맛있게, 즐겁게 다 먹어야겠단 생각이 든다. 원하는 사람은 설거지나 청소 등의 봉사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설거지를 자원했는데, 일할 사람이 충분하니 편하게 둘러보고 가라며 사양하길래 한 번 더 감사하단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람말을 머리에 두르고 식사하는 사람들 / 사진. ⓒ신예희
아참, 어느 종교든 사원을 방문할 땐 아무래도 。잖은 옷차림을 하는 게 좋다. 태국 전통 불교 사원은 짧은 하의를 입은 사람에겐 치마처럼 두를 수 있는 큼직한 천을 빌려주기도 하고, 이슬람교 사원은 전신을 가리는 기다란 가운을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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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크교 사원에선 머리에 스카프를 두건 형태로 질끈 묶어주는데, 이걸 람말(Rumal)이라고 한다. 여성의 머리와 목, 귀, 어깨를 모두 가리는 히잡과 달리 람말은 성별과 관계없이 두피 부위를 가리는 거라 크기가 작다. 한편, 시크교 사원을 방문한 후 방콕의 힌두교 사원 중 규모도 역사도 가장 대단한 스리 마하마리암만(Sri Maha Mariamman)을 돌아보며 비교하는 것도 무척 재미있다. 어찌나 분위기가 다른지,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멀리스트의 저택을 번갈아 구경하는 느낌이랄까.
시크교 사원과 한결 다른 분위기의 힌두교 사원 / 사진. ⓒ신예희
[좌] 태국인지 인도인지 헷갈리는 파후랏 [우] 독특한 소품 쇼핑하기 좋다 / 사진. ⓒ신예희
시크교 사원이 자리 잡은 파후랏(Phahurat) 지역은 인도계 커뮤니티가 발달해 일명 리틀 인디아라고 불린다. 볼거리, 먹을거리, 살 거리가 두루 많은 재미있는 동네이지만 대중교통편이 애매해 항상 아쉬웠는데,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이던 2019년 8월경 드디어 지하철 삼욧(Sam Yot)역이 개통했다. 덕분에 여행의 난이도가 확 줄었다.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방콕을 찾았다가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기쁘던지.
다양한 음식이 한 쟁반에 나오는 탈리 / 사진. ⓒ신예희
[좌] 무시무시하게 달콤한 맛이다 [우] 화려한 색의 인도 과자들 / 사진. ⓒ신예희
인도 전통의상과 액세서리, 향신료, 소품 등 재미난 게 가득하지만 파후랏은 역시 맛있는 인도 식당을 탐험하는 게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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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덕에서 순식간에 구워낸 따끈하고 향긋한 난, 다채로운 향신료를 듬뿍 넣은 커리, 담백한 탄두리 치킨 등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흔해진 반가운 메뉴도 좋고, 아예 여러 가지 음식이 예쁜 쟁반에 골고루 담겨 나오는 탈리를 먹는 것도 즐겁다. 탈리는 말하자면 인도 백반이라고 해야겠다. 양고기와 닭고기 등을 두루 쓴 탈리도 있고, 유제품을 포함한 채식 탈리도 있다. 뭘 고르든 마무리는 심하게 달콤한(정말 심하다) 인도 과자가 좋겠다. 파후랏 골목에 늘어선 전통 과자。에서 색색의 과자 서너 .을 골라 차와 함께 야금야금 맛보자.
태국어와 중국어가 섞인 야오와랏 풍경 / 사진. ⓒ신예희
설 명절엔 온갖 행사가 벌어진다 / 사진. ⓒ신예희
여기서부터 조금만 걸어가면 곧 방콕의 차이나타운인 야오와랏(Yaowarat) 지역에 도착한다. 지하철을 타도 좋지만 겨우 한 정거장이다. 1700년대 후반에 형성된 야오와랏은 전 세계 차이나타운 중에서도 규모와 볼거리 면에서 두루 손꼽히는 명소다. 방콕을 여행할 때 여길 들르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만약 설 명절 무렵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거대한 축제의 현장이나 마찬가지니까.
왓 망콧 내부는 붉고 화려하다 / 사진. ⓒ신예희
태국 내 중국계 이민자는 대부분 지리적으로 태국과 가까운 광둥성과 푸젠성, 하이난성 등 중국 남부 지역 출신이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하니 이동 거리가 관건이어서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화교가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 북부의 산둥성 출신이 대부분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온 이민자들은 으레 종교 사원 주변에 모여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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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정착 초기에 이런저런 도움을 주고받기도 좋고, 익숙한 언어와 음식 등에서 안정감을 느꼈으리라.
이민자의 소망이 담겼을 촛불 / 사진. ⓒ신예희
야오와랏의 중심은 중국 불교 사원인 왓 망콘 카말라왓(Wat Mangkon Kamalawat)이다. 태국의 국교인 태국 불교 사원은 황금색과 유리 타일 모자이크로 눈부시게 장식한 높고 뾰족한 탑 형태의 건축 양식이고, 왓 망콘은 중국 남부 건축 양식의 단층 구조물에 용과 봉황 등을 화려하게 장식해 진한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칠했다. 얼핏 봐도 참 다르다. 왓 망콘은 특히 삼재 액땜을 하는 곳으로도 인기가 많아, 석가모니와 약사여래불, 지장보살, 포대화상 등 다양한 불상 앞에서 열렬히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사람이 가득하다. 경내를 한 바퀴 구경하고 나올 무렵엔 옷에 자연히 연기 냄새가 잔뜩 밴다.
[좌] 젊은 감각의 딤섬 플레이팅 [우] 전통적인 중국 후식을 트렌디하게 바꾸었다 / 사진. ⓒ신예희
당연하지만 야오와랏엔 중국 음식。이 아주 많다. 딱 봐도 아주 오래된 고풍스러운 식당과, 젊은 세대의 감각을 더한 식당이 공존한다. 특히 인기 있다는 한 딤섬 전문。은 전통적인 음식의 조리법과 담음새를 살짝 변형한 게, 마치 화려한 애프터눈 티 한 상을 받는 느낌마저 주길래 놀랐다. 가게 내부와 외부 장식도 카페 느낌이라 눈길을 확 사로잡으니, 이거야 원, 사진을 수없이 찍게 된다. 더불어 야오와랏의 명물인 달콤한 연두부 디저트 가게 역시, 두유와 두부 등 전통적인 중국 식재료를 쓰면서도 시각적으로 트렌디하게 포장해 손님이 끊이지 않는 모습이 감탄스럽다.
해가 질 무렵의 야오와랏 / 사진. ⓒ신예희
그런데 놀랍게도, 야오와랏의 진면목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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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해가 질 무렵, 갑자기 사람들이 어디선가 테이블과 의자를 잔뜩 날라다가 길에 펼치고, 금세 노.이 끝도 없이 줄지어 영업을 준비한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이글이글한 숯불이 등장하고, 온갖 싱싱한 해산물이 스티로폼 박스째로 쌓인다. 차이나타운 특유의 태국어와 중국어가 섞인 커다란 빨간색 간판들은 낮에 봐도 화려한데, 밤에는 네온 조명까지 더해져 정신이 하나도 없다. 방콕에서 절대 놓치면 안 될 신나는 볼거리다.
한편, 약 200만 명에 달하는 태국 내 말레이계 이민자 커뮤니티도 빼놓을 수 없다. 태국 남부와 국경을 맞댄 말레이시아 북부는 1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이슬람교를 국교로 믿는 파타니 왕국이었는데, 20세기 초반 태국에 병합되었다. 지금도 태국 남부 지역은 인구의 70% 이상이 말레이계 무슬림이다.
수도 방콕에도 물론 말레이계 이민자의 거리가 여러 곳 형성되었다. 특히 지상철 랏차테위(Ratchathewi)역 근처의 다룰 아만 모스크(Darul Aman Masjid)는 태국어와 말레이어로 예배를 진행하고 있어 지역 주민뿐 아니라 무슬림 여행자들도 많이들 찾아온다. 가장 북적이는 건 역시 이슬람교의 안식일인 금요일인데, 모스크 주변의 할랄 음식 노.과 식당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말레이시아 음식은 살짝 기름지고 간이 달짝지근해 입에 착 붙는다. 향긋한 코코넛 밀크 풍미가 감도는 쌀밥과 반찬의 조합인 나시 르막(Nasi lemak), 인도 커리와는 아주 다른 말레이식 커리, 쫄깃한 로띠 빵과 거품이 가득 쌓인 밀크티 떼 따릭(teh tarik)…
여행을 하면 할수록 시야가 넓어진다는 소리를 종종 듣지만, 교과서같이 뻔한 얘기로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데 한 도시 안에서 여러 문화를 맛보는 즐거운 순간엔 그 말의 의미가 확 다가온다. 여행이 주는 모든 경험을 감사한 마음으로 계속 수집해 나가고 싶다.
층 구조물에 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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