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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의 날’(24일)을 앞두고 20일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각자도생 움직임과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기조 등으로 유엔과 다자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다”면서도 “기후변화, 평화 유지, 빈곤 해결 같은 이슈는 국제 사회 전체의 문제인 만큼 유엔은 다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장승윤 기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1944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외무부에 들어갔다. 2004년 1월∼2006년 11월 외교통상부 장관을 거쳐 2007년 한국인 최초로 제8대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했고, 연임에 성공해 2016년까지 10년간 재임했다. 재임 중 파리 기후변화협정,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채택, 유엔여성기구 창설 등을 이끌었다. 퇴임 후에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 재단’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가능발전 등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다자외교의 중심지로 평화 유지, 기후변화 대응, 빈곤 해결 등에 적극 나섰던 유엔의 달라진 요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착잡하다.”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 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82)은 ‘유엔의 날(24일)’을 앞두고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엔이 과거처럼 국제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실제로 유엔의 핵심 역할을 해온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간 협력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오히려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앞장서서 유엔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도 발생했다. 미국은 올해 1월과 2월 각각 베네수엘라와 이란을, 러시아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월 재집권하면서 결정한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와 유엔 분담금의 대대적인 삭감도 큰 악재다.
이런 현실을 언급하며 반 전 총장은 “지금 유엔, 나아가 국제 사회가 큰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유엔이 지향해 온 가치와 목표는 인류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라며 “기후변화, 감염병, 식량 문제, 핵확산 등 국제 협력이 필요한 이슈가 지속되는 한 유엔은 중요한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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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이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안보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유엔은 물론이고 국제 사회에서도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이 각자도생에 나서고 있다. 심지어 미국과 러시아는 전쟁까지 일으켰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뒤 ‘미국 우선주의’가 강도 높게 추진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 안팎에서 계속 긴밀한 협력을 유지해 온 미국, 영국, 프랑스 관계도 흔들리고 있다. 협력과 대안 마련을 위한 논의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유엔이 지향해 온 다자주의가 위기를 맞이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엔이 처음 생길 때 핵심 역할을 했고, 최대 재정적, 정치적 후원국이었던 미국이 최근 유엔에 회의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게 정말 큰 걱정거리다. 1945년부터 유엔을 기반으로 평화 유지 활동, 인도적 지원, 개발 협력 등을 주도했던 미국이 유엔에 지금처럼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지난 81년간 국제 사회가 지향한 다자주의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미국이 유엔에서 주도한 다자주의를 기반으로 그동안 국제 협력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 낸 경우가 많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전통과 성과를 등한시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유엔은 어떤 타격을 받았나.
“현재 미국은 아주 최소한의 재정 지원만 하고 있다. 매년 정규 분담금의 22% 정도를 책임지던 나라가 사실상 지원을 중단한 것이다. 이 여파로 2700여 명의 유엔 직원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전문성을 갖춘 인력들이 단기간에 큰 규모로 구조조정된 것이다. 또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탈퇴한 66개의 국제기구 중 31개가 유엔 직속 기구다.”
―유엔이란 조직 자체가 비효율적이란 지적도 많은데….
“트럼프 2기 행정부 집권 뒤 미국에서 불만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무시해선 안 된다. 유엔 내 조직, 재정, 업무 시스템 전반에 걸쳐 개선 작업은 꼭 필요하다. 특히 유엔은 회원국들의 분담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인 만큼 효율성과 투명성을 더 강조해야 한다. 관료주의에서도 탈피해야 한다.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의 구성, 지역별 대표성,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문제 등을 현실에 맞게 바꾸는 것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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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올해 12월 31일 임기 만료)의 뒤를 이을 차기 사무총장은 이런 부분도 많이 고민해야 한다.”
―유엔이 예전의 위상을 찾을 방법은 없는 건가.
“유엔은 1945년 창설되면서부터 평화, 인권, 개발을 ‘3대 축’으로 인류가 직면한 심각한 위협에 맞서 왔다. 대표적으로는 기후변화, 감염병, 빈곤, 난민, 식량 문제, 핵확산 방지, 에너지 안보 같은 이슈가 여기에 속한다. 특히 기후변화가 그렇다. 장기적으로 볼 때, 정말 인류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얼마 전 네팔에서 빙하 붕괴에 따른 돌발 홍수로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례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또 인공지능(AI) 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인한 혼란같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국제적 차원의 협력은 꼭 필요하다.”
―결국 유엔이 다시 영향력을 회복할 것이란 뜻인가.
“지금 언급한 문제들은 특정 나라 혹은 일부 나라들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 국제 사회 전체가 나서야 하는 만큼 대화와 협력의 공간은 꼭 필요하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유엔의 역할과 가치는 인정받게 될 것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다음 미국 대통령은, 누가 되든 트럼프 대통령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유엔 사무총장 당시 기후변화 대응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지금도 가장 관심을 가지는 글로벌 어젠다가 기후변화다. 유엔 사무총장으로 10년간 활동하면서 북극을 네 번, 남극을 한 번 방문해 빙하가 얼마나 많이 빠르게 녹고 있는지를 전문가들과 함께 확인했다. 해수면 상승이 문제인 남태평양 국가 키리바시에선 호텔에도 갑자기 물이 차는 것에 대비해 구명복이 비치돼 있었다. 이렇게 직접 현장을 누볐기에 퇴임 직전까지 노력을 기울여 파리 기후변화협정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탈퇴했지만, 절대다수의 유엔 회원국, 미국 캘리포니아와 뉴욕 등 24개 주,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들은 유엔의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한국은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안보리 비상임이사국도 맡는 등 유엔에서 상당한 역할을 해 왔다.
“우리는 일제의 식민 지배와 억압, 6.25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고 오늘날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권위주의에서 자유 민주주의로, 분단 국가이지만 중견국 외교의 선도 국가로 성장했다. 그런 만큼, 경제력과 첨단산업, 민주주의의 경험, 그리고 국제 사회에서 축적한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국제 질서의 규칙과 협력 방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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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자주의와 국제규범을 지키고, 분쟁 예방과 평화 구축, 글로벌 기후위기 대응 등에서도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은 국제 기구나 국제 사회에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전쟁과 빈곤을 극복하고 발전을 이룬 한국의 경험 자체가 국제 사회와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최근 국제 사회에서 크게 위축된 공적개발원조(ODA)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것도 한국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의 ODA는 전년보다 실질 기준 23.1% 감소해 역대 최대 폭의 하락을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ODA를 늘리고, 교육, 보건, 기후변화 대응 같은 분야에서 개발도상국의 자립 역량을 높이는데 역할을 담당하는 건 큰 의미가 있다. ODA 규모를 유엔이 권장하는 국민총소득(GNI) 대비 0.7%까지 올리는 건 장기 목표로 하되, DAC 평균인 0.35%까지는 끌어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외교관으로 30년 넘게 활동했다. 최근 논란이 되는 한미 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이슈와 외교부 세종시 이전에도 관심이 많을 것 같다.
“먼저 전작권 전환 문제는 우리와 국제 사회가 어떤 상황인지를 잘 봐야 한다. 우리는 분단 국가이고, 북한은 핵 무력국이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과 가까운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 이런 부분들을 감안할 때 조금 시간을 가지고 추진하는 게 지혜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조급할 필요가 없다. 외교부의 세종 이전은 너무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는 조치다. 서울에 있는 110여개 외국 대사관이 세종으로 갈 순 없다. 물리적으로 세종에 공관을 만들 자리도 없다. 그런데 실제 추진되면 앞으로 외국 대사들이 우리 외교부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세종으로 가야 하는 불편함이 생긴다. ‘대면 외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외교는 전화로 하는 것과 직접 얼굴 보면서 하는 게 정말 천양지차다. 그래서 걱정이 많이 된다. 집에서 외교부 세종 이전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엔의 날
1945년 10월 24일 유엔 헌장이 발효돼 유엔이 공식 출범한 것을 기념하는 날. 유엔 총회는 1947년 이날을 ‘유엔의 날’로 정했고, 1971년 회원국에 공휴일 지정을 권고했다. 한국은 1950년부터 공휴일로 지정했으나, 1976년 북한의 유엔 산하기구 가입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인터뷰=이세형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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