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1834년 출판된 ‘아일랜드 남부의 요정 전설과 전통’ 서적에 수록된 밴시 도판. 피아니스트 소냐 구미코 리가 ‘밴시’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 헨리 카웰.
10월 31일은 핼러윈이다. 유령과 마녀가 등장하는 이런 날에 어울릴 법한 음악이 하나 있다. 바로 미국 작곡가 헨리 카웰(Henry Cowell·1897∼1965)의 ‘밴시(The Banshee)’. 유령을 묘사한 작품은 연주하는 모습마저 강렬하다.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피아니스트가 귀신으로 변해 있는 듯하다.
‘밴시’는 아일랜드 민담에 등장하는 여자 형상의 초자연적 존재다. 누군가의 죽음이 가까워지면 나타나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아일랜드어 ‘반 시(bean si)’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요정 여인이라는 뜻이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울어서 붉게 충혈된 눈, 섬뜩한 흐느낌과 새된 비명은 밴시를 묘사할 때 빠지지 않는 요소다.
카웰은 밴시의 울음소리를 피아노로 재현했다. 그런데 주법이 조금 기묘하다. 그랜드 피아노 뚜껑을 열고 옆에 서서 현을 하프처럼 튕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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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끝으로 줄을 문지르고, 때론 손톱으로 긁기도 한다. 악보에는 무려 열두 가지 연주법이 기호로 표시되어 있다.
다른 한 사람은 건반 앞에 앉아 댐퍼 페달을 계속 밟는다. 울림과 잔향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다. 두 사람이 한 대의 피아노에 매달려 있지만, 정작 건반에는 누구도 손을 대지 않는다.
피아노의 울음은 낮게 흐느끼다가 돌연 날카로운 절규처럼 솟구친다. 어디선가 기분 나쁜 쇳소리가 삐걱거리고, 목을 쥐어짜는 듯한 훌쩍임도 들린다. 아름다운 선율이나 익숙한 화음을 기대했다면 당혹스러울 만하다.
QR코드를 찍으면 ‘헨리 카웰의 밴시’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카웰은 일찍이 피아노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몰두했던 사람이다. 팔과 주먹으로 건반 여러 개를 한꺼번에 누르는 음 다발, 이른바 클러스터 기법을 실험했고, 현을 직접 만져 소리를 내는 ‘스트링 피아노(string piano)’ 주법도 개척했다. ‘밴시’는 그의 탐구 정신이 빚어낸 기괴한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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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영상을 보면 더욱 기이하다. 한 여성 연주자가 길고 검은 손톱에 장발을 풀어 헤치고 홀로 피아노 줄을 긁는다. 그녀 자신이 밴시로 변신한 듯하다. 처녀 귀신이나 일본의 원혼을 연상시키는 외양이 적잖이 으스스하다.
두 남성이 연주하는 또 다른 사례. 여기서는 피아노 속을 헤집는 사람이 의자에 앉은 자를 향해 접근하는 모습이 마치 인간을 할퀴려는 밴시처럼 보인다. 페달을 밟는 이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저 꼼짝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밴시’를 통해 옛이야기 속 혼령이 20세기 초 음악가의 상상력 속에서 되살아나는 순간을 본다. 몇 분짜리 소품이지만 독특한 소재와 건반이 아닌 현 자체를 뜯는 참신한 시도가 어우러져 피아노에 대한 익숙한 관념마저 뒤흔든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밴시’가 음악과 연극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 줄을 매만지며 튕기는 손짓이 어느새 망령의 소름 끼치는 움직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한 편의 공포극이 되는 셈이다.
영상을 보고 나면, 갑자기 그랜드 피아노 뚜껑을 여는 것이 망설여질 수도 있다. 밴시가 손톱으로 현을 긁으며 홀연히 나타날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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