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페루를 지나는 안데스산맥의 해발 4562m 고지대에 위치한 ‘팔카코차 빙하호’. 1941년 빙하호를 지지하던 방벽이 붕괴되면서 다량의 호숫물이 쏟아져 주민 4000여명이 숨졌다. 페루 국립빙하생태계연구소(INAIGEM) 제공
페루 서부, 해발 4562m에 있는 에메랄드빛의 ‘팔카코차’ 호수. 빙하가 녹은 물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이 빙하호 하류에 있는 산악지대 도시 우아라스에 농부 사울 루시아노 리우야가 살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작물 생산량은 급격히 줄었고, 주민들은 언제 빙하호가 붕괴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고 있다. 2015년 리우야는 기후변화로 인한 홍수 위험을 키운 책임을 지라며 독일의 거대 에너지기업 RWE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3일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리우야는 이날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안데스에서 함양까지, 기후피해에 기업의 책임을 묻다’ 간담회에 참석해 “1941년 이미 대규모 빙하호 범람 사태로 우아라스 절반이 파괴됐고 수천명의 사람이 사망했다”며 “내가 거주하고 있는 산악지대 인근에는 빙하호가 500개가량이 있고, 팔카코차 빙하호의 규모가 .. 커지고 있어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난해에도 소규모 범람 사고로 한 가족이 사고를 당했다”며 “지난 8월 네팔 빙하호 붕괴 홍수 이후 주민들이 굉장히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안데스에서 함양까지, 기후피해에 기업의 책임을 묻다’ 간담회에서 페루의 농부 사울 루시아노 리우야(가운데)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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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솔루션 제공
매일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일상에서도 리우야는 기후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그는 “30년 전에는 감자를 1년 동안 보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두 달만 지나도 벌레가 생겨 엉망이 된다”며 “옥수수도 예전에는 3년 동안 보관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보관하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기온 상승으로 해충이 늘면서 작물 생산량은 줄고, 방제와 비료에 드는 부담은 커졌다고도 했다.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목축에도 어려움이 생겼다. 과거에는 계곡에 물이 풍부했지만 빙하가 줄어들고 산악지대가 건조해지면서 가축에게 먹일 풀이 부족해졌다. 빙하호 범람으로 수질이 나빠지면서 물을 확보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산악 가이드로도 일하는 리우야는 “예전에는 산이 빙하로 덮여 있어 하얗고 아름다웠지만, 빙하가 녹아내리고 암석이 드러나면서 예전과는 풍경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리우야가 지구 반대편의 독일 기업에 책임을 물은 것은 RWE가 세계적으로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해 온 기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리우야는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기업들이 배출한 온실가스로 빙하가 녹으면서 자신의 집이 빙하호 붕괴 홍수(GLOF) 피해를 입을 위험이 커졌다며 RWE에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 기여도에 비례하는 책임을 지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인위적인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RWE의 책임을 약 0.5%로 보고, 우아라스 지역의 홍수 피해를 예방하는 데 필요한 350만달러(약 47억원) 중 1만7500달러(약 2350만원)를 내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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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독일 함 고등지방법원은 리우야의 집이 홍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다만 기후변화가 전 지구적인 현상이라는 이유만으로 개별 기업의 민사 책임을 배제할 수는 없고, 구체적인 피해 위험과 기업 기여도가 입증되면 기업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판시했다. 온실가스를 배출한 기업과 기후변화 피해자가 지구 반대편에 있더라도 기업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법관이 직접 우아라스를 찾아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도 했다.
리우야는 이날 한국전력을 상대로 기후소송을 제기한 한국 농민들과도 만났다. 경기 이천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다 올해부터는 쌈 채소로 작물을 바꾼 송기봉씨, 충남 당진에서 벼농사를 짓는 황성열씨, 경남 함양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마용운씨다. 이들은 지난해 8월 폭염과 폭우 등 기후변화로 발생한 농작물 피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한국전력과 발전 자회사 5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농민들의 이야기를 들은 리우야는 “기후변화에 기여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까지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며 공감을 표했다. 그는 “10년 전 소송을 시작했을 때는 고향 사람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산이 나에게 용기를 줬다”며 “여러분이 가시는 길을 이해한다. 걸어야 하는 길이지만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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