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삶에 정착한 이들. 정착 이후에도 크고 작은 경계를 극복해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합니다. 지리적 경계만이 아니라 문화와 관계의 새로운 세계를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삶 위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몰랐고, 알아야 할 삶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겠습니다.
김수정 씨와 남편의 모습.(본인 제공).
"엄마냐, 남편이냐.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어요."
외동딸로 자란 김수정(34) 씨는 2015년 북한에 홀어머니를 남겨 두고 남편과 돌이 갓 지난 첫째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함께 살던 남편의 외조부모에게는 "결혼식만 보고 오겠다"는 쪽지만을 남겼다.
그렇게 처절하게 탈북한 김 씨의 한국 생활은 벌써 11년을 맞았다. 그간 장당 5원짜리 박스 접기 부업과 도시락 가게 일을 하며 생계를 해결한 끝에 지금은 충북 청주시 오송 바이오 산업단지의 직장인이 됐고 '내 집 마련'의 꿈도 이뤘다. 하지만 어머니를 데려오지 못한 죄책감은 여전하다고 한다.
북한에선 '모범생'으로 살아…"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1992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김 씨는 북한에서 스스로 '모범생'이었다고 했다. 남한 드라마를 잠깐 본 적은 있지만 다른 세상을 동경해 본 적은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북한에서 나와서야 내가 살았던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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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부모를 여의고 혼자 떠난 여동생에게 '오빠 구실'을 못 했다는 미안함이 큰 남편의 마음이 움직이는 듯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읜 김 씨에게는 혼자 남을 어머니가 걸렸다.
"남편이 떠나면 저는 북한에서 '소박맞은 여자'가 되는 거예요. 거기는 아직 봉건적이라 엄마 곁에 있어도 평생 꼬리표가 붙을 것 같았어요."
남편이 혼자 떠나면 어머니 곁에 남아도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김 씨도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 시누이가 브로커에게 낸 돈은 갓난아이 몫까지 1인당 1300만 원, 모두 3900만 원이었다.
바나나와 온수, 그리고 인천공항
그런데 막상 두만강 앞에 서니 다시 망설임이 밀려왔다. 김 씨는 강을 건너는 순간까지도 "안 가면 안 되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강을 건넌 김 씨의 마음이 바뀐 건 중국 브로커의 집에서였다.
"바나나랑 사과를 주더라고요. 북한에선 바나나를 모형이나 사진으로만 봤어요. 이 비싼 걸 나한테 준다고? 먹어 보니 너무 맛있어서 '아, 가야겠다, 살아야겠다' 싶었죠."
물을 틀자 온수가 나왔다. 북한에선 우물물을 길어 한 달에 한두 번 씻었다고 했다. 김 씨는 그때를 '우주를 만나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김 씨의 가족은 한동안 낮에는 자고 밤에 차로 이동하며 알 수 없는 여정을 거친 끝에 태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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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의 한 수용소 같은 곳에서 보름을 지냈다. 일주일에 한 번 한국대사관 직원과 면담할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던 김 씨는,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외출했다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수정 씨와 가족들의 모습.(본인 제공).
남편의 방황, 밤새워 박스 조립하며 버텨낸 생계
하지만 정착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하나원에서 가족 면회를 한 날 둘째가 생겼지만, 남편은 한국 사회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거기선 남자들이 떠받들어지며 살다가 여기 와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 거예요. 남편이 '도로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김 씨는 남편을 보며 북한으로 되돌아간 탈북민들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한국을 읽어가는 시간'이 필요한데, 과도기를 넘지 못한 것 같다고 김 씨는 말했다.
남편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자 자연스레 생계 해결은 김 씨의 몫이 됐다. 임신한 몸으로 남편에게 아이를 맡긴 채 자정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출산 후에도 일주일 만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자전거로 왕복 1시간 반을 오가며 화장품 박스 접기 일을 받아 와 밤을 새워 조립했다. 장당 5원, 한 달을 꼬박 박스를 조립해도 25만 원이 겨우 손에 들어왔다.
8개월 뒤 남북하나재단 취업상담사의 도움으로 아이를 맡길 곳을 찾았고 도시락 가게에서 4년간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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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아이를 돌보며 할 수 있는 일로 도시락 체인.을 차렸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4년을 버텼지만 새벽 5시에 나가 새벽 2시에 들어오는 생활이 감옥 같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게 '처절하게' 산 보람이 있었다. 오송에 '내 집'을 분양받고 32세에 지금 회사에 입사했다.
김수정 씨.(본인 제공).
"딸들에겐 정말 잘한 선택"
다행히 남편이 제자리를 찾았다. 남편은 "그땐 내가 사람이 아니었다"라며 방황의 시간을 미안해한다고 김 씨는 전했다.
김 씨는 두 딸을 보며 새삼 탈북을 '잘한 결심'으로 느낀다고 한다.
"거기서는 여자가 맞아도 아무 소리 못 해요. 딸들이 그런 데 시집가서 고생하는 걸 어떻게 보겠어요."
김 씨는 탈북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라고 해요. 사람을 만날 때 상대가 나한테 관심을 갖게 하는 게 쉽지 않은데, 우리는 그게 장.이죠."
북한을 보는 시각은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고 있다. 처음엔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을까"라는 생각뿐이었다면, 지금은 "북한이 왜 저렇게까지 됐을까, 누구 책임인가"를 묻는다고 한다.
"거기서 살 땐 먹는 것만 해결하는 게 삶의 목표인 줄 알았어요. 여기 와 보니 좋은 집, 좋은 차도 갖고 싶더라고요. 사람이 간사하죠. 그래도 노력한 만큼 돌아오니까, 만족하면서 살아요."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탈북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에 김 씨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당연하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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