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휴에 할머니를 보러 온 엄마 혹은 기다리는 엄마가 생각나서 찾아 온 막내딸. /김윤지
사랑이 무거운 쪽은 머무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연휴가 싫었다.
할머니는 연휴와는 먼 사람이었다. 밭의 콩은 연휴에도 자라고 깨는 대체공휴일을 모른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누구보다 긴 연휴를 기다리셨다. 달력의 5월과 10월은 늘 오른쪽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왜 그렇게 연휴를 기다리시는지 제대로 여쭌 적은 없다. 얼핏 듣기로는 엄마가 초등학생이던 시절부터라고 했다. 부산으로 유학 간 두 아들이 집에 오려면 이틀은 걸렸다. 교통편도 차비도 빠듯하던 시절, 마음 놓고 아들을 기다릴 수 있는 때는 연휴뿐이었다.
물론 아무 날도 아닌 토요일 오후에도 할머니는 아들을 기다리셨다. 그 모습은 내가 본 할머니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장에서 큰맘 먹고 사둔 꼬들꼬들한 말린 생선을 만지작거리고, 밥에 찹쌀을 섞을까 고민하느라 부뚜막에 불을 늦게 지피셨다. 신방천 앞에 버스가 멈춰 서면 그 뒤에 가려진 얼굴이 아들인가 싶어 마음을 졸이셨다. 끝내 아들이 보이지 않으면 생선을 다시 신문지로 싸고, 찹쌀을 비닐봉지에 넣으며 평범한 저녁을 준비하셨다. 셋째인 이모가 도시로 떠나고 막내인 엄마가 결혼한 뒤에도 할머니는 마을 어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할아버지와 어둑해진 뒤에야 숟가락을 들었다.
할머니의 막내 손주인 내가 태어나고 육아가 할머니 몫이 된 뒤에야 주말 저녁이 더는 적적하지 않았다. 그래도 긴 연휴면 할머니는 다시 기다림을 자처했다. 올지 안 올지 연락도 없는 아들들을 위해 어린 나를 데리고 '빨간 바께쓰'를 든 채 오일장을 누비며 하루에 하나씩 요리를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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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무르는 이의 삶에 생기가 도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 시절의 나도 할머니와 비슷했다. 대구에 사는 작은 외삼촌의 딸, 동갑내기 사촌 정원이를 애타게 기다렸다. 시골 아이인 나와 달리 공주 그림도 잘 그리고 옷도 예쁘게 입는 그 애를 나는 동경했다. 할머니가 작은아들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나는 엄마가 주던 용돈 삼천 원을 아껴 불량식품을 샀다. 도시 아이가 못 먹어봤을 리 없지만 새콤한 맛을 좋아하는 그 애에게 줄 최선의 선물이었다. 전도장, 진교장을 누비며 차린 할머니의 밥상과 다를 바 없었다.
정원이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와 나는 아침부터 마을 회관 앞에서 지나가는 차만 바라봤다. 외삼촌이 퇴근하고 오면 오후일 텐데도 그냥 기다렸다. 같이 할 것, 놀 것, 물어볼 것을 실컷 준비해 두어도, 정원이는 잘 때가 되면 외숙모 품으로 쏙 파고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갈 텐데, 나랑 좀 더 놀다 자도 될 텐데. 가운데 방으로 들어간 그 애를 데리고 나오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이불 속에서 훌쩍였다.
돌아가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가 슬쩍 눈물을 닦고 나가 배웅했다. 대구로 돌아가는 하얀 승용차의 뒷모습을 보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정원이가 뭘 두고 가서 다시 우리한테 왔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하고 싶었지만 어른이라서 하지 못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차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몇 걸음이 슬펐다. 할머니는 미처 들려 보내지 못한 검은 비닐봉지를 보며 안타까워했고, 할아버지는 묵묵히 농기구를 챙겨 논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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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겨진 나는 이불에 누워, 쌩하니 가버린 그들을 야속해하며 울었다. 그날 할머니는 그 말을 오래 되뇌셨다.
어느 순간부터는 상실감이 너무 커서 정원이가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물론 외삼촌네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연휴가 끝나면 출근하고 등교해야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억울해서 다짐했다. 다시는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시는 반가워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머무르지 않겠다고.
공교롭게도 중학생이 되면서 우리 가족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남겨두고 도시로 이사했다. 드디어 나는 머무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더는 정원이를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연연하지 않았다. 그게 도시의 멋이고 내가 원하던 삶이라 생각했다.
하동에 가면 할머니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갈 채비를 하면 어김없이 붙잡았다.
"하루만 더 있다가 가라."
그 말에 괜스레 짜증이 났다. 바라지 않은 기다림, 원하지 않은 챙김이라 여겼다. 할머니가 제멋대로 만든 음식을 안 먹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사실은 할머니가 어떻게 기다리는지 누구보다 잘 알아서, 미안해서 난 짜증이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데,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나는 다시 떠나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할머니도 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었을 거라 생각했다. 실망하고 속상한 일은 누구나 싫으니까. 그런데도 끝내 묻지 못했다. 자식들이 가고 나면 서운하지 않으냐고, 억울하지도 않으냐고. 답은 이미 알았지만 그 답을 들으면 할머니를 남겨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알고도 모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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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로 시작하는 익숙한 번호가 액정에 뜨면 마음이 내려앉았다. 일부러 받지 않은 날도 있었다. 엄마에게 할머니가 공부하는데 자꾸 전화한다는 못된 말을 하기도 했다. 내 '여보세요'가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윤지야~' 하는 나긋하고 주름진 목소리가 처음엔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났다. 다음 전화에선 할머니가 생각하는 만큼 멋지지 못한 내가 싫어서 짜증이 났다. 할머니는 그저 내 생각이 나서, 보고 싶어서 침침한 눈으로 전화번호 수첩에서 내 이름을 찾았을 텐데.
나는 그 전화로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확인했다. 나는 도시에서도 가벼워지지 못한 채, 가벼워지려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불시에 나를 끌어당기면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미련한 짓이었다. 내 피에 할머니의 무거움이 남아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는 자식들이 돌아가겠다고 할 때마다 처음 듣는 말처럼 서운해하셨다. 큰외삼촌네가 떠난 날에는 사립문을 닫지 못하고, 마을가에서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문밖으로 고개를 내미셨다. 사랑이 너무 커서, 내가 견디지 못한 그 괴로움을 할머니는 매번 견디며 우리를 기다리셨다.
상처받으면서도 기꺼이 머무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밤새 놀아주지 않던 정원이가 미웠던 그날 이후, 나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언제나 사랑에서 이기는 쪽, 가벼운 쪽인 척했다. 하지만 가장 강한 사람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아래에 머물러 있던 할머니였다.
/김윤지 하동군 근무
☞필자는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도 있었다. 엄마에